Wednesday, March 23, 2011

어느 지식인의 용기있는 고백에 나는 찬사를 보낸다.


사진은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


오늘자 고국의 조선일보의 한 칼럼을 보면서, 그의 용기있는 고백에 가까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데로 밝힌 내용을 읽으면서, 흔히들 먹물을 먹은자들의 무조건적인 박통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비하했었는가의 시류에서 빠져나와 이유와 그것이 잘못된 편견이었음을 늦었지만 깨닫고, 당시의 국가적 상황을 재인식하는 사실을 간략하지만, 의미있게 써내려간 내용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분에게 열열한 후원을 한다고 전하고 싶다. 오늘의 조국이 부국의 대열에 서서 국민들이 보리고개 없이 편리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먹는것 걱정없이 살수 있도록 국가 산업의 기초를 닦아 놓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점에,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조금은 가벼워 지는것 같다.
여기에 그 칼럼을 옮겨 놓았다.


[아침논단] 용기있는 변절과 비겁한 지조

*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

입력 : 2011.03.23 22:23

▲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

박정희 독재를 혐오했는데 나라 밖에서 공부해 보니
한국 富의 분배·경제성장 성공 사례로 각광받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지식인의 지조인가

1970년대 유신정권의 잔혹함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차라리 암살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만큼 그의 독재를 혐오했다. 정부가 발표하는 눈부신 경제 성장의 수치도 믿지 않았다. 서양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도 선진국들의 역사를 공부함으로써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왜곡되고 잘못 가고 있는지를 밝혀보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어렵게 장학금을 받아 넓은 세상에서 공부하다 보니 깨달음이 많았다. 국내에서 듣던 바와는 달리 모든 객관적 지표는 대한민국이 부(富)의 분배에서 상당히 성적이 좋은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 케이스로 각광받고 있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왜곡된 길을 가고 있는 나라들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 뒤에야 비로소 우리 사회와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금지되었기에 오히려 더 근사해 보이던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자세히 공부해보니 허점투성이였다. 이런 사상적 궤적을 겪은 나를 어느 좌파 성향의 네티즌은 한마디로 '변절자'라고 공격했다.

나 역시 학창 시절 사회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던 고 리영희 교수의 저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조를 지키며 수형생활까지 마다하지 않은 그는 분명 용기 있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리 교수가 작고하기 전에 한 가지만은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즉 자신이 모택동의 중국에 대해 잘못된 허상(虛像)을 퍼뜨려 많은 젊은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떠나고 말았다.

반면 안병직 시 대정신 이사장은 197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서 한국을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지목하면서 비판했었다. 그러던 그가 한국의 자본주의적 성장을 찬양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을 때 그를 따르던 몇몇 제자들은 사제지간의 연을 끊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안 교수는 자신의 '전향'을 알리면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고치고자 노력해왔다.

지식인들이 이념의 허상에 사로잡혀 실상을 보지 못하는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문인인 사르트르와 카뮈는 나치즘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한 동지였다. 전후(戰後)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좌파가 아니면 입도 뻥끗할 수 없을 정도로 좌경화가 심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역시 사악한 전체주의임을 파악한 카뮈는 모든 종류의 혁명적 폭력을 비판하는 '반항인'(1951)을 발표하고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카뮈의 행동은 대단히 용기 있는 결단이었지만 프랑스 지성계를 장악하고 있던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당혹 그 자체였다.

사르트르 의 신랄한 비난과 카뮈의 긴 반론이 있은 후 두 사람은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으며 카뮈는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추방된 거나 다름없었다. 사르트르가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데에는 카뮈가 7년 먼저 그 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1956년 자유를 갈구하는 헝가리 민중의 봉기를 소련 탱크가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서유럽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도 회의가 일었지만 사르트르는 1980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그의 명예는 그전에 이미 훼손되어버렸다. 미국제국주의가 형편없다면 소련제국주의는 훨씬 더 형편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던 것이다. 그의 '지조'는 과연 무엇을 위한 지조였을까.

나 이가 들고 성숙해지면서 젊은 시절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것을 변절(變節)이라고 비난하고, 자신조차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과 이념을 겉으로만 붙들고 있는 사람을 지조 있다고 칭송한다. 운동권에서 보수 정치가로 전향한 김문수 경기도지사를 변절자라고 비판한다든지, 우파 인사들이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위장 취업자라고 조롱하는 태도가 그렇다.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두 번이나 당적을 바꾸었지만 그를 두고 변절자라고 욕한 영국 국민은 없었다. 세상이 변하고 정치적으로 성숙해짐에 따라 그의 입장이 바뀌었을 뿐임을 이해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더 이상 자신이 믿지 않는 옛 이념을 버리기 아쉬워서 혹은 추종자들을 놓치기 싫어서 혹은 변절자라는 소리를 듣는 게 두려워서 붙들고 있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사석에서 인정하는 사실을 공개적으로는 부인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들에게 이제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후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고 역사 앞에 떳떳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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