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ugust 17, 2010

강제 합병된지 100년후의 조국을 본다....경제에 맞게 정신 연령이 성숙했으면...

금년이 조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지 100 주년이 된다고 한다. 지금으로 부터 50-60년전의 가난하고 못살았었던 기억이 나에게도 기억속에 생생하다. 지금의 발전된 조국과 당시의 나의 기억속에 저장되여 있는, 가난하고 희망도 없어 보였던 상황을 비교해 보면, 말로는 다 표현하지못할, 슬픔과 애환이 가슴과 머리속에서 메아리 쳐진다. 해방된 조국이였는데도 그렇게 어려웠던 기억만 떠오르는데, 하물려 강제로 합병된, 잃어버린 조국땅에서 주인 행세도 못하고, 노예같은, 기르는 말과 소처럼, 하라는데로 살아야 했던 조상님들과 선배님들의 당시의 삶의 질을 어렴푸시나마 그림을 그려볼수 있겠다. 얼마나 서럽고 원통했었을까? 지금의 김정일 치하의 이북동포들이 아직도 그때와 다름없는 굶주림과 고통과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언론을 통해서 접하면서, 먼저간 조상님들 고달픔과 울분을 이해 할려고 한다. 조국 남한의 국민들은 이제는 정신적으로 더 성숙하여, 조국의 번영과 자유를 유지하기위한 마음의 다짐을 굳게 하시기를 바라고 싶다.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남한 조국의 정치판을 보노라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별이 한되는 망나니짖들을 거리낌 없이 해대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식민지 통치하에서의 그들의 부모, 친척들의 노예 생활상을, 역사를 통하여 공부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번영된 조국의 앞날을 위해 헌신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픈 심정이다. 일제 강제 합병이나, 김정일과 그일당이 저지르는 만행이 하나도 다를게 없다는것을 정치꾼들이 마음으로 부터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겨, 정신적으로 성숙된 국민의 일원이 되여, 후세에 밀사 3인과 같은 인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아래의 글은 고국의 조선일보에서 발췌하여 옮겨 실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7/2010082701672.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8/201008280003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5/2010082501539.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18/2010081800038.html?Dep1=news&Dep2=top&Dep3=top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0/2010082000094.html?Dep1=news&Dep2=top&Dep3=top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
이한수 기자 hs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100자평(10)
입력 : 2010.08.18 03:06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제목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병합 사실을 타전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1910년 8월 18일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JAPAN IS ABOUT TO ANNEX KOREA)'라는 제목의 도쿄발(發)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 때 실질적으로 종식됐다"고 보도했다.


▲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는 큰 제목과 ‘어떤 소요도 예상되지 않는다’ ‘철저한 경찰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소제목들이 달렸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8월 20일자에 "한국 전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함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병합은 임박했다"고 썼다. 8월 22일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라는 제목 아래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0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후 '한국은 이제 일본'(23일), '일본, 한국병합 공포한다'(25일)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 유력지 더타임스도 8월 25일 "일본의 한국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paramount)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8월 27일자 더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과 한국'이란 글을 실은 독자는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100년 전 회의참석 거절당한 한국,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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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영국 외무장관 시골 저택까지 찾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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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ㆍ학술
[韓·日 강제병합 100년… 조선의 운명 가른 '다섯 조약' 현장을 찾아] [4]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입력 : 2010.08.11 02:43 / 수정 : 2010.08.11 07:12

고종 밀사 3명(이상설·이준·이위종) 쫓아냈던
'기사의 집(당시 회의장·The Hall of Knights)'…
이제 6유로 (약 9300원)내면 맘껏 관광
믿었던 러시아 초청 거부…
"을사늑약은 효력 없다" 회의장 앞 울분의 연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 등 지금은 한국인들 맹활약
和 "G20 초청해달라" 로비도…

네덜란드 의회와 정부 사무실이 모여 있는 헤이그 도심 비넨호프(Binnenhof) 광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기사의 집(The Hall of Knights)' 탑의 시계가 오후 3시를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동차가 한가롭게 손님을 맞았다. 관광객과 행인들이 벤치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었다. 1907년 6월 26일 지구 반대편 대한제국에서 온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밀사 3명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보다 훨씬 분주했을 것이다.

1907년 6월 15일 오후 3시, 45개국 대표 239명이 참석한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기사의 집'에서 막을 올렸다. 헤이그시(市) 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은 이날 비넨호프 광장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각국 대표단이 마차를 타고 잇달아 회의장에 입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막 열흘 뒤인 6월 25일 헤이그역(Hague HS)에 도착한 이상설 등은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1905년 9월 이범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가 만국평화회의 주최국인 러시아로부터 초청을 받았으나, 정작 회의 직전에는 일본의 보호국이란 이유로 공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은 무효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 상태로 몰아넣고 독립을 존중한다고 한다."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했던 스무살 청년 이위종은 닫힌 회의장 앞에서 연설한 뒤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장료 6유로(약 9300원)를 내고, 안내원이 딸린 '기사의 집' 투어에 참가했다. '기사의 집'은 높이 26m의 천장 아래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를 끼워 맞췄다. 13세기 중반에 처음 세워졌고, 1900년쯤 대대적 수리를 마친 이곳은 제2차 만국평화회의 당시엔 더 당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당시 밀사들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했던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른쪽 왕좌(王座) 위에 알파벳 'B'가 새겨져 있다. 베아트릭스(Beatrix) 현 네덜란드 여왕 이름의 첫 글자다. 여왕은 매년 9월 셋째 화요일에 황금마차를 타고, '기사의 집'에 와서 왕좌에 앉아 다음 해 시정 방향을 알리는 연설을 한다. 네덜란드 상·하원, 정부 각료는 물론 왕족과 외교관들까지 참석하고, 언론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 성대한 행사다. 1904년 빌헬미나 여왕이 시작한 이래 100년 넘게 이어지는 전통이다.

열강들이 각축하던 시기에 세계 평화를 도모한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제1차 회의가 1899년 헤이그에서 2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헤이그가 회의 장소로 선택된 것은 네덜란드가 당시 대표적 중립국이었고, 여러 차례 평화회의를 개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제2차 회의가 속개됐고, 그해 10월 18일 폐막한 만국평화회의는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협약' 등 협약 13개와 선언 2개, 권고 5개 등 국제 사회의 새 규칙을 만들어냈으며, '국제중재재판소' 설치(1909년)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 네덜란드 정치 1번지로 꼽히는 헤이그 비넨호프 광장의‘기사의 집’. 1907년 한국의 밀사들이 입장을 거부당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이다. /헤이그〓김기철 기자
45개 참가국 대표들이 20세기 국제 사회의 새 판을 짜는 회의에 한창일 때, 회의장 밖으로 밀려난 밀사들은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외교 활동에 착수했다. 숙소인 드 용 호텔(Hotel De Jong·현 이준 기념관)에 태극기를 내건 이들은 6월 27일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보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렸다. 7월 8일, 이위종은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를 발표했다. "일본이 기마병, 보병, 그리고 포병부대를 동원해 서울을 둘러싸고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1905년 11월 15일 이토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주머니를 훔치는 위선자인 일본은 백주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하고 야수적인 것이다."

헤이그 중앙역에서 서쪽으로 운하를 건너면 프린세스가(街) 6·7번지에 닿는다. 붉은 벽돌색 낡은 3층 건물 앞에는 내부수리 때문인지 출입금지선이 드리워져 있었다.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당시 각국 대표단과 사회운동가, 기자들이 모이는 '국제서클(Circle International)'이 이 자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이위종이 '한국의 호소'를 발표했다.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기대 일본의 주권침해를 고발하려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밀사 파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위협에 밀려 강제로 퇴위당했다. 하지만 쿤 드 퀘스터(Koen De Ceuster) 네덜란드 레이덴대 교수는 "헤이그 특사단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막지 못했지만, 한국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과 국가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 이위종이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연설을 한‘국제 서클’이 있던 건물. /헤이그〓김기철 기자
고종의 밀사들이 '길거리 외교'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흔히 일본의 방해공작을 거론한다. 그러나 최근 학계는 일본뿐 아니라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구 열강들도 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가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당초 한국을 초청했던 러시아는 1906년 이즈볼스키 외상 취임과 함께 영·일과의 타협을 추진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으로 한국의 보호국화를 승인했던 영국은 을사늑약 이후 주한 공사관을 철수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와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의 공사관 철수도 종용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7일)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승인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국가' 때문에 '문명국가' 간의 전쟁이 벌어지는 사태를 막자는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헤이그에는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과 권오곤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 부소장 등이 국제기구 간부로 활약하고 있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도 사찰관 3명이 진출해 있다. 김영원 주네덜란드 대사는 "네덜란드로부터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초청해달라는 로비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100년 전 회의 참석조차 거절당했던 세 밀사들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보면 자신들의 활동이 헛되지 않았다고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동북아역사재단 공동기획

http://news.joins.com/article/065/4392065.html?ctg=1005&cloc=home|list|li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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