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31, 2008

부강한 조국건설을 위한 박통의 고뇌와 멀리서 본 그분의 광채나는 눈빛.


내가 군대생활을 마친지 금년으로 41년이 지났다. 긴세월 같은데 하루만에 흘러간 시간같이만 느껴지는 이유는 군대제대후부터, 한치의 앞도 안보이는 어수선하고 당시 가난했던 조국의 상황이 나를 조금이라도 마음놓고 편히 쉬게 했던 기억이 없이, 조마조마한 상황에서 삶을 위한 발길을, 확실한 보장도 없는, 나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하는, 쫒기는 듯한 시간들을 보내왔기 때문인것 같다.

당시의 조국상황은 자주국방의 슬로건아래, 한손에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남한을 지키기위해 총칼을 들고, 한손에는 조국재건을 위해 농기구를 들고, 그렇게 바삐 뛰자는 위정자를 비롯한 모든 국민들의 참여속에 주야로 건설의 망치소리가 끝이지 않고 움직이던 때였다.

국비로 교육시켜주는 철도 학교에 겨우 턱걸이 입학하여, 과정을 마치고, 국가시험을 거쳐 공무원이 된후, 현장에서의 짧은 근무를 거쳐, 지금은 대우 빌딩인, 당시의 교통센터에 둥지를 툰 본청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그무렵부터 민방위 훈련(물론 1/21사태로 시작된것이지만)과 CPX(도상군사훈련)를 주기적으로 실시하면서, 조국방위를 군대만이 아니고 후방의 국민들도 직장에서 분담하던 때였다.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 나지 않지만, 야간근무로,신혼의 꿀맛을 내는 신부를 단칸삭월세방에 혼자남겨두고, 지하벙커에서 CPX훈련을 하고 있을때, 현장을 방문하여 훈련 독려와 위로, 그리고 훈련 점검을 손수 하고 다니시던 박통이 몇명의 경호원만 대동하고 나타났을때, 그분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뚜렷히 남아 있다. 까므잡잡한 얼굴에 미소는 전연없고, 검은 안경을 끼고, 조그만 지휘봉을 오른손에 쥐고, 군대용 그린잠바 차림의 모습. 도상훈련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는 자동적으로 의자에서 용수철이 튀듯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그분이 나갈때까지 취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어떤 언급이나 지시도 없이 이곳 저곳 훈련장을 둘러 보고 나가셨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지근거리에서 내눈으로 직접 보았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 조국의 중앙일보기사에서, 월남전에 파견된 자식같은 군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영양 보충에 없어서는 안될 김치의 공급을 위해 미국측에 특별히 김치 보급을 허용해 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 했다는, 역사속의 기록을 읽으면서, 지도자로서 그분의 자상함과 고뇌를 느껴 볼수 있었다. 다시한번 그때의 시절을 머리속에 그려 봤다. 참 세월은 빠르게 날아감을 또 한번 실감하는 이아침이다.

여기에 그기사의 일부를 옮겨 놓았다. 기회가 있을때 마다, 또 읽고 읽고 해 볼려고 그랬다.


월남전 당시 한 전투진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식,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하고 고유한 전통부식이 있다. 그것이 ‘김치’인데 김치만이라도 하루바삐 월남에 있는 한국 장병들이 먹을 수 있게 한다면 사기는 훨씬 앙양될 것으로 믿는다.”

1967년 3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직접 존슨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라며 보낸 친서 내용의 일부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한국 정부로서는 한국 장병들이 한국 음식을 먹고 싶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미 9개월 전부터 통조림으로 된 야전식량(C-ration)을 연구했고 생산까지 완료해 성과는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다. 만일 야전식량을 공급하게만 된다면 사기와 전투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할 것으로 확신한다.”

누가 봐도 친서는 파월 한국군을 위해 대통령이 부식까지도 신경을 쓸 만큼 장병들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박 대통령의 애정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김치까지도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원이 된다는 것을 대통령이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미국도 기꺼이 환대했다. 정 총리가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라마 국방장관, 험프리 부통령과 함께 김치 C-레이션 공급 문제를 거론하자 즉석에서 ‘우리도 좀 먹어보자’고 했을 만큼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 언론이 전하는 보도였다. 이처럼 한편에서는 파병으로 우리의 반공이념과 우방에 대한 신의를 보여주면서, 한편에서는 경제개발 자금을 벌어들이는 시장으로서 월남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점을 정부가 분명히 했기 때문에 기업들도 외화를 벌 수 있는 길을 찾아 날개를 퍼덕이는 분위기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정부나 기업이나 월남은 희망의 땅으로 떠오른 셈인데, 그럴 때 한진이 달러 금광을 캐겠다고 나섰으니까 비록 미국 펜타곤 친구들을 등에 업고 떠난다고는 하지만 우리 정부로서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조중훈 회장도 정부의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정부로서는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을 생각했겠지만 조 회장은 그것과 함께 월남이 한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곳으로 확신했다는 것이다.

“11월 1일이 우리 한진그룹 창립기념일인데, 매년 그날이 되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만감이 교차되기도 해요. 그동안 여러 역경이 있었지만 월남에 진출할 때나 빚더미에 앉아 있던 대한항공을 인수할 때 생각을 해보면 참 심각한 결단을 했구나 싶지요. 특히 월남은 전쟁터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눈에 금광이 보이기는 했지만 금광이 무슨 소용 있어요. 캐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터인데. 그러나 기업의 기회는 변화에서 오는 거니까 숱한 어려움과 고난을 각오하고 진출을 했던 겁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개인이든 기업이든 1달러라도 벌어오는 사람이 애국자니까 수송을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나가서 외화 가득을 하면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사실 정부도 그런 기대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확고한 신념 없이 그게 돼요? 우리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는데 그게 기적이 아니에요. 그만치 노력했고 그 위험한 포화 속에서도 신용을 지켜 일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의 한진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월남이라는 무대에서 누가 더 주연급으로 활약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진 같은 그룹이 솟아오를 수 있었다는 얘기로 들리기도 했다. 물론 한진 성장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조중건 고문(전 부회장)도 한국의 경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월남 시장은 분명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보건대, 이런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동감할는지 모르지만 한국 경제가 돌기 시작한 것은 월남 파병으로 받은 군인들 봉급, 또 한진 같은 유수한 기업들이 많은 외화 가득을 한 것이 원동력이 됐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월남 파병을 안 했던들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는 힘들었겠다, 그걸 하면서 미국에도 큰소리쳤고 경제원조도 더 받았고, 안보문제를 제기해 군사원조까지 더 받으면서 일어설 수 있지 않았겠느냐. 그런 데다가 월남으로 갔던 기업들뿐 아니라 개인들까지 이것저것 외화 가득을 많이 해서 형편이 좋아지고 그게 다 밑거름이 된 거 아니냐, 그 돈을 다 송금하고 산업에 투자해서 이만큼 발전을 가져온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분명히 월남은 지금 생각해도 은혜의 땅이었다구요.”

아무튼, 누구도 엄두를 못 내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길바닥이 우리 자산이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국내 운송업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던 한진이 이제 월남 시장을 한진의 시장으로 평정하겠다고 나설 때 선봉대장을 자임한 인물은 조중건 상무였다. 물론 조중훈 회장이 쌓았던 경험과 닦아놓은 대로(大路)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조 상무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특유한 친화력과 미군 통역장교 시절 맺은 끈끈한 인맥을 최대한 발휘해 미군의 물동량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막상 떠날 때는 조 상무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쟁 중인 나라에 기업의 장래가 걸린 신작로를 닦으러 출정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심적 부담이 여간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날짜는 1월 23일로 정해졌어요. 이미 비행기도 편도 티켓까지 끊어놓은 상태였단 말이죠. 근데 솔직히 막막해요. 관광이나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심정이다 보니까 집사람한테도 얘기를 못했어요. 가방도 내가 챙겼어. 더우니까 반소매 작업복 한 벌 쑤셔 넣고 타이프라이터 하나 챙기고 돈 3000달러 준비하고. 비행기 표는 왜 편도만 가지고 가느냐, 돌아올 땐 월남에서 번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는 거지요. 집사람한테도 딱 떠날 때쯤 알리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불안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배짱도 생겨요. 내가 한국군에서 소금국도 먹어봤고, 일선에도 가 있었고, 미국 군대도 가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접시도 하루 2시간씩 닦아봤고, 신문배달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는 인생의 밑바닥을 다 걸었는데 전쟁이야 한국전쟁도 경험했잖느냐,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좀 놓이는 거지요. 1월 22일이 구정입니다. 잔뜩 차려 먹고 내일 떠나는데 이젠 말을 안 할 수 없잖아요. ‘여보, 나 내일 월남 간다.’ 깜짝 놀라는 거죠. 더구나 전쟁을 하는 곳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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