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루각"은 모래밭위에 건축해 놓은 집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부서지거나 날아가 버린다는 뜻으로 알고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한창 아직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화된 사회로 경제의 틀이 바뀌고 있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커다란 인재사고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진 사고,성수대교가 폭삭주저앉은 대형사고"등등...
영국이 주도한 산업혁명 당시에도 예상치 않은 인재 사고는 빈발했었던것으로 배워 알고 있다.
한국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신앙처럼 실천해 오면서 국민들에게 외쳐댔었던 구호가 있었다. "단군조선이래 5천년동안 보물처럼 후손들에게 전수해온 '가난'을 다시는 후손들에게 전해주지 말자. 열심히 일하면 극복된다'라는 신념과 Leadership을 국민들에게 주지시키면서 손수 앞장서서 경제건설의 현장에서 뛰면서 국민들을 이끌었었다.
농업국가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는것은,오늘날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안되는 그런 사고방식들이 당시에는 당연한것쯤으로 여기고, 어쩌면 자포자기했었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창원 울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중화학공업을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지하철을 뚫고,서울인천, 서울 수원간에 현대철도인 전철화를 했었고, 포항제철을 경주의 허허벌판에 건설했었고,철강산업과 연결되는 자동차 산업에 시동을 걸었고....
그렇게해서, 세계 역사상 그유례를 찾아볼수없는, 불과 30여년만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농업국가에서 산업화된 근대국가로 변환하여 유능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수출의 붐이 일어, 첫번째 1억달러 수출했을때, 온 나라가 잔치를 하는것 처럼 경축했었던 그기억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뇌리속에 있다.
요즘 고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보면, Infrastructure를 포함하여 서구사회보다 훨씬 잘먹고, 즐기는것을 쉽게 구분할수있다. 정치만 빼고 모든면에서 세계일등국가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위에 정치만 쪼끔만 정신 차려서 현재의 위치에서 약 5%만 Upgrade시킬수 있다면, 스웨덴 스위스 국가들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가 될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우리 한민족의 피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정치꾼들이여 속좀 차리소서. 하루가 급하데이...
산업화를 위한 산업현장에 뛰어들지는 않고, 소위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유명한 정치꾼들과 일부 국민들은 박정희시대에 있었던 '자유를 유보하고 독재를하고, 국민들자유를 억압했었다'라고 지금도 비난하는 자들이 있는것 알고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협주의자들이라는것을 나는 감히 외친다.
외모만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던 그사람들은 후에 대통령까지 했지만, 국가안위를 위해 국민들이 우러러 받들만한 업적을 찾기 힘들다. 국가 안보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햇볕정책의 허구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뿐만이 아니고 전서방세계가 위협을 느끼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겠다.
영웅은 시대와 장소가 만들어 낸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나는 그말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세종대왕이 추앙받지만, 미국의 George Washington대통령, 링컨 대통령,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시대를 현재의 Social Standard에 적용하면, 모두가 독재자일 뿐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만 빼고, 전부다 지금 한국민의 눈에서는 영웅으로, 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시대의 국민들은 하나의 소모품이었었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노예를 개인적으로 500명 이상씩 소유하고 있었던,인권유린한 독재자였었다. 그러나 그런 나쁜점 보다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미국의 영웅으로 한국의 대왕으로 칭송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영웅이면서 독재자들에 비하면 너무도 선량한 대통령이었다고 인정을 해주는 국민들의 정신적 성숙과 양심이 가슴속에자리하고 있어야 진정한 잘사는 나라의 긍지를 갖일수 있을 것이다.
아직 중학교 다닐때, 도덕시간에 배웠던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었다. 세상 살아가면서, 국민들의 예의 범절을 놓고볼때, 훌륭한 조상님들,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느껴본적이 없어, 나의 생각을 많이 Confuse하게된다. 이제라도 "김문수"전 경기도 지사의 말씀처럼, 잘한점은 추겨주고, 사소한 불찰은 덮어주어, 국가적 영웅을 만들어 내는데 국민들의 협동심과 지혜를 총동원해야 할때가 지금 아닐까?라고 믿는다.
동남와,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을 탐방해보면, 오히려 그곳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한국민들은 참으로 복이 많다. 자기네 나라에도 그러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라고 부러워 하는 표현을 하는 주민들과 많이 만나면서, 박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을 더했었다. 불행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을 후세에 기리기위한 기념관 또는 상징물 하나 없다고 들었다.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그분은 기념관 또는 상징물이 무려 12개가 넘는다고 들었다. 이얼마나 편협적인 한국민들의 국가관인가?
https://lifemeansgo.blogspot.com/2019/10/blog-post_28.html
아래는 동아일보의 기사내용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청진에 가자.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야 못하겠는가.”(정주영 동아일보 에세이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중)
1931년 강원 통천군 시골마을의 배고픈 열여섯 살 소년은 구장집이 받아보는 동아일보에 실린 구인광고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드릴 땔감 값을 1, 2전씩 빼돌려 가출 자금을 모았다. 첫 번째 가출은 아버지에게 덜미 잡혀 실패로 끝났다. 세 번째 가출도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훔쳐 서울로 야반도주해 부기학원을 다녔다. 몇 달 뒤 아버지가 찾아와 “종손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하소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가출은 성공이었다. 서울 쌀가게의 배달원 정주영은 특유의 바지런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주인과 손님의 신용을 얻었다. 주인이 쌀가게를 넘겨준 1937년, 22세의 청년 정주영은 서울 신당동 일대 ‘경일상회’ 사장이 됐다. 이 쌀가게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을 탄생시킨 사업 밑천이 됐다.
○ 기업가 정신으로 일군 한국 기업 100년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100개를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상위 20개 가운데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장면만 6개였다. ‘한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1976년·3위), ‘현대차 설립’(1967년·6위), ‘현대중공업 1호선 진수 및 인도’(1974년·8위) 등이 해당된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문, 철도, 산업화 등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자동차·건설 강국을 일궈낸 정 회장의 삶 자체가 한국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위 중 삼성과 관련된 장면도 6개다. 1위인 ‘이병철 도쿄 선언’(1983년)을 비롯해 ‘삼성전자 설립’(1969년·4위), ‘이건희 신경영선언’(1993년·7위) 등이다.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된 ‘포항제철 첫 쇳물 생산’(1973년·2위), ‘박태준의 하와이 구상’(1969년·15위)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하와이에서 목 놓아 울다가 대일청구권 자금 활용 아이디어를 떠올려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그 장면이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정부가 먼저 중화학산업 육성책을 내놓았고 기업이 이에 발맞춰 경제성장을 이뤘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제를 가능케 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들의 출현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19년 첫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성방직(경방)이 등장한 이후 창업가 정신으로 뭉친 기업인들이 농업 한국을 경공업 한국으로, 이어 중화학공업 한국, 첨단 전자산업 한국으로 퀀텀점프시키는 주역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이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투자나 기술 자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대차 설립이 1967년인 것은 마침 미국 포드가 1966년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사업 파트너를 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사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포드가 기술 이전이 가능한 합작사 설립에는 발을 빼자 현대차는 독자 생존밖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포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창립요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68년 세계은행이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 5년 만의 쾌거였다.
○ 한국을 넘어 세계로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선언’은 한국이 ‘품질 경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한 획기적 순간이다. 시작은 일상에서 비롯됐다. 삼성 사내방송인 SBC가 한 프로그램에서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끼워 맞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로 출장길에 올랐던 이 회장은 기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비서실로 전화해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아내와 자식만 빼놓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명언이 이때 나왔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이 일본 견제에 나서면서 ‘엔고’ 시대가 열렸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값이 비싸지면서 1990년대 초반 한국 상품은 잘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량품을 칼로 깎아 억지 제품을 만드는 수준의 품질로는 일류기업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 학장은 “1990년대 삼성의 혁신적 경영방침, 조직개편 등은 많은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줬다. 품질경영 선언 역시 재계로 확산돼 한국 기업의 체질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 이후 글로벌 정상에 오르는 한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0년 한국 조선산업이 수주량, 건조량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휩쓸었다. 2006년 삼성전자 TV는 소니를 이기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1999년 미국에서 실시한 파격적인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아 자동차 5대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1986년 ‘엑셀’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지 13년 만이었다.
○ 이동통신·인터넷·뉴 키즈의 등장
1990년대 인터넷과 이동통신, 386 기업인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지형을 또 한 번 바꿨다. 현재 재계 3위인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정부 출범 둘째 해인 1994년 인수했다. 1996년 세계 최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통신강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1995년 한메일이라는 e메일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다음의 등장(19위)과 1999년 네이버 서비스의 시작(12위)은 ‘뉴 키즈’ 기업인 시대를 예고했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27세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32세에 회사를 차렸다.
한국 기업사의 주요 명장면 중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허무하게 사라진 ‘대우 해체’(1998년·10위)도 있다. 세계 경영의 자부심, 외환위기의 아픔, 어떤 기업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장면이었다.
▼ 자문위원 30명, 5개분야 나눠 사건 중요도 평가 ▼
자문위원 명단(30명·가나다순)
http://www.donga.com/news/home/article/all/20191209/98712406/1
"와우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진 사고,성수대교가 폭삭주저앉은 대형사고"등등...
영국이 주도한 산업혁명 당시에도 예상치 않은 인재 사고는 빈발했었던것으로 배워 알고 있다.
한국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었지만,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신앙처럼 실천해 오면서 국민들에게 외쳐댔었던 구호가 있었다. "단군조선이래 5천년동안 보물처럼 후손들에게 전수해온 '가난'을 다시는 후손들에게 전해주지 말자. 열심히 일하면 극복된다'라는 신념과 Leadership을 국민들에게 주지시키면서 손수 앞장서서 경제건설의 현장에서 뛰면서 국민들을 이끌었었다.
농업국가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는것은,오늘날의 지식과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안되는 그런 사고방식들이 당시에는 당연한것쯤으로 여기고, 어쩌면 자포자기했었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창원 울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중화학공업을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뚫고, 지하철을 뚫고,서울인천, 서울 수원간에 현대철도인 전철화를 했었고, 포항제철을 경주의 허허벌판에 건설했었고,철강산업과 연결되는 자동차 산업에 시동을 걸었고....
그렇게해서, 세계 역사상 그유례를 찾아볼수없는, 불과 30여년만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농업국가에서 산업화된 근대국가로 변환하여 유능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수출의 붐이 일어, 첫번째 1억달러 수출했을때, 온 나라가 잔치를 하는것 처럼 경축했었던 그기억이 지금도 어제일처럼 뇌리속에 있다.
요즘 고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보면, Infrastructure를 포함하여 서구사회보다 훨씬 잘먹고, 즐기는것을 쉽게 구분할수있다. 정치만 빼고 모든면에서 세계일등국가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위에 정치만 쪼끔만 정신 차려서 현재의 위치에서 약 5%만 Upgrade시킬수 있다면, 스웨덴 스위스 국가들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가 될수 있는 능력과 자질이 우리 한민족의 피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정치꾼들이여 속좀 차리소서. 하루가 급하데이...
산업화를 위한 산업현장에 뛰어들지는 않고, 소위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유명한 정치꾼들과 일부 국민들은 박정희시대에 있었던 '자유를 유보하고 독재를하고, 국민들자유를 억압했었다'라고 지금도 비난하는 자들이 있는것 알고있다.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편협주의자들이라는것을 나는 감히 외친다.
외모만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던 그사람들은 후에 대통령까지 했지만, 국가안위를 위해 국민들이 우러러 받들만한 업적을 찾기 힘들다. 국가 안보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햇볕정책의 허구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뿐만이 아니고 전서방세계가 위협을 느끼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겠다.
영웅은 시대와 장소가 만들어 낸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나는 그말을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세종대왕이 추앙받지만, 미국의 George Washington대통령, 링컨 대통령,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시대를 현재의 Social Standard에 적용하면, 모두가 독재자일 뿐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만 빼고, 전부다 지금 한국민의 눈에서는 영웅으로, 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세종대왕시대의 국민들은 하나의 소모품이었었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노예를 개인적으로 500명 이상씩 소유하고 있었던,인권유린한 독재자였었다. 그러나 그런 나쁜점 보다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에 미국의 영웅으로 한국의 대왕으로 칭송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영웅이면서 독재자들에 비하면 너무도 선량한 대통령이었다고 인정을 해주는 국민들의 정신적 성숙과 양심이 가슴속에자리하고 있어야 진정한 잘사는 나라의 긍지를 갖일수 있을 것이다.
아직 중학교 다닐때, 도덕시간에 배웠던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그때는 그렇게 믿었었다. 세상 살아가면서, 국민들의 예의 범절을 놓고볼때, 훌륭한 조상님들,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느껴본적이 없어, 나의 생각을 많이 Confuse하게된다. 이제라도 "김문수"전 경기도 지사의 말씀처럼, 잘한점은 추겨주고, 사소한 불찰은 덮어주어, 국가적 영웅을 만들어 내는데 국민들의 협동심과 지혜를 총동원해야 할때가 지금 아닐까?라고 믿는다.
동남와, 미국, 그리고 아프리카 국가들을 탐방해보면, 오히려 그곳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한국민들은 참으로 복이 많다. 자기네 나라에도 그러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라고 부러워 하는 표현을 하는 주민들과 많이 만나면서, 박대통령에 대한 고마움을 더했었다. 불행하게도 박정희 대통령을 후세에 기리기위한 기념관 또는 상징물 하나 없다고 들었다. 햇볕정책을 주창했던 그분은 기념관 또는 상징물이 무려 12개가 넘는다고 들었다. 이얼마나 편협적인 한국민들의 국가관인가?
https://lifemeansgo.blogspot.com/2019/10/blog-post_28.html
아래는 동아일보의 기사내용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 청진에 가자. 어디 가서 어떤 노동을 해도 지금보다야 못하겠는가.”(정주영 동아일보 에세이 ‘나의 기업 나의 인생’ 중)
1931년 강원 통천군 시골마을의 배고픈 열여섯 살 소년은 구장집이 받아보는 동아일보에 실린 구인광고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드릴 땔감 값을 1, 2전씩 빼돌려 가출 자금을 모았다. 첫 번째 가출은 아버지에게 덜미 잡혀 실패로 끝났다. 세 번째 가출도 동아일보에 난 부기학원 광고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훔쳐 서울로 야반도주해 부기학원을 다녔다. 몇 달 뒤 아버지가 찾아와 “종손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고 하소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번째 가출은 성공이었다. 서울 쌀가게의 배달원 정주영은 특유의 바지런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주인과 손님의 신용을 얻었다. 주인이 쌀가게를 넘겨준 1937년, 22세의 청년 정주영은 서울 신당동 일대 ‘경일상회’ 사장이 됐다. 이 쌀가게는 오늘날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을 탄생시킨 사업 밑천이 됐다.
○ 기업가 정신으로 일군 한국 기업 100년
동아일보가 자문위원 30인과 함께 100개를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 중 상위 20개 가운데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관련된 장면만 6개였다. ‘한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1976년·3위), ‘현대차 설립’(1967년·6위), ‘현대중공업 1호선 진수 및 인도’(1974년·8위) 등이 해당된다.
1915년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 이후 등장한 신문, 철도, 산업화 등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조선·자동차·건설 강국을 일궈낸 정 회장의 삶 자체가 한국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위 중 삼성과 관련된 장면도 6개다. 1위인 ‘이병철 도쿄 선언’(1983년)을 비롯해 ‘삼성전자 설립’(1969년·4위), ‘이건희 신경영선언’(1993년·7위) 등이다. 포항제철 건설과 관련된 ‘포항제철 첫 쇳물 생산’(1973년·2위), ‘박태준의 하와이 구상’(1969년·15위)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이 하와이에서 목 놓아 울다가 대일청구권 자금 활용 아이디어를 떠올려 오늘날 포스코를 만든 그 장면이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정부가 먼저 중화학산업 육성책을 내놓았고 기업이 이에 발맞춰 경제성장을 이뤘다. 당시 한국으로서는 불가능한 과제를 가능케 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들의 출현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1919년 첫 근대식 주식회사로 꼽히는 경성방직(경방)이 등장한 이후 창업가 정신으로 뭉친 기업인들이 농업 한국을 경공업 한국으로, 이어 중화학공업 한국, 첨단 전자산업 한국으로 퀀텀점프시키는 주역이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한국이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세계는 비웃었다. 투자나 기술 자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현대차 설립이 1967년인 것은 마침 미국 포드가 1966년 한국에 진출할 목적으로 사업 파트너를 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회사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포드가 기술 이전이 가능한 합작사 설립에는 발을 빼자 현대차는 독자 생존밖에 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포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 포철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창립요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1968년 세계은행이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종합제철 건설을 연기하고 노동 및 기술 집약적인 기계 공업 개발을 우선 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 5년 만의 쾌거였다.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한국에 전자산업을 뿌리내린 혁신적 기업인이었다. 한국 최초의 라디오, TV, 세탁기, 냉장고는
모두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나왔다. 한국인의 일상을 바꾼 화장품(럭키크림), 하이타이(최초의 합성세제) 등도 LG의
작품이었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기업가 정신이 오늘의 한국 일궈내” ▼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선언’은 한국이 ‘품질 경영’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마련한 획기적 순간이다. 시작은 일상에서 비롯됐다. 삼성 사내방송인 SBC가 한 프로그램에서 세탁기 뚜껑이 불량인데도 라인 작업자가 태연하게 부품을 칼로 깎아낸 뒤 대충 끼워 맞추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했다. 당시 일본에서 독일로 출장길에 올랐던 이 회장은 기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비서실로 전화해 200여 명의 삼성 수뇌부를 독일로 불러들였다. “아내와 자식만 빼놓고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명언이 이때 나왔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이 일본 견제에 나서면서 ‘엔고’ 시대가 열렸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값이 비싸지면서 1990년대 초반 한국 상품은 잘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불량품을 칼로 깎아 억지 제품을 만드는 수준의 품질로는 일류기업 근처에도 못 간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 학장은 “1990년대 삼성의 혁신적 경영방침, 조직개편 등은 많은 다른 기업에 영향을 줬다. 품질경영 선언 역시 재계로 확산돼 한국 기업의 체질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 이후 글로벌 정상에 오르는 한국 기업들이 속속 등장했다. 2000년 한국 조선산업이 수주량, 건조량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1위를 휩쓸었다. 2006년 삼성전자 TV는 소니를 이기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1999년 미국에서 실시한 파격적인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아 자동차 5대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1986년 ‘엑셀’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지 13년 만이었다.
○ 이동통신·인터넷·뉴 키즈의 등장
1990년대 인터넷과 이동통신, 386 기업인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지형을 또 한 번 바꿨다. 현재 재계 3위인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정부 출범 둘째 해인 1994년 인수했다. 1996년 세계 최초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은 통신강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1995년 한메일이라는 e메일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다음의 등장(19위)과 1999년 네이버 서비스의 시작(12위)은 ‘뉴 키즈’ 기업인 시대를 예고했다. 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27세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는 32세에 회사를 차렸다.
한국 기업사의 주요 명장면 중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허무하게 사라진 ‘대우 해체’(1998년·10위)도 있다. 세계 경영의 자부심, 외환위기의 아픔, 어떤 기업도 영원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장면이었다.
▼ 자문위원 30명, 5개분야 나눠 사건 중요도 평가 ▼
퀀텀점프 100장면 어떻게 뽑았나
동아일보가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은 취재팀이 자문위원 30명과 함께 자료 수집, 설문,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국 기업사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1차 선정한 후 이를 △한국 기업사 △기술혁신 △거시경제 사건 △인수합병(M&A) △혁신 상품 및 브랜드 등 5가지 분야로 나눠 자문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제·경영학을 비롯한 이공계 분야 대학교수, 국책연구소, 경제단체, 전직 관료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은 중요한 장면에 순위를 매겼고 취재팀은 이를 바탕으로 총 100개를 확정했다.
동아일보가 내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선정한 ‘한국 기업 100년, 퀀텀점프의 순간들’은 취재팀이 자문위원 30명과 함께 자료 수집, 설문,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한국 기업사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1차 선정한 후 이를 △한국 기업사 △기술혁신 △거시경제 사건 △인수합병(M&A) △혁신 상품 및 브랜드 등 5가지 분야로 나눠 자문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및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제·경영학을 비롯한 이공계 분야 대학교수, 국책연구소, 경제단체, 전직 관료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은 중요한 장면에 순위를 매겼고 취재팀은 이를 바탕으로 총 100개를 확정했다.
자문위원 명단(30명·가나다순)
△
권오경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한국공학한림원 회장 △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장 겸 대외부총장 △ 김민호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 김승우 순천향대 스마트자동차학과 교수·경영부총장 △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나정효 충남대 전기공학과 교수 △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서승원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
서영경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이니셔티브(SGI) 원장 △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 서진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 신민수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 양현봉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 △ 이인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이형준
한국경영자총협회 기획실장 △ 장영재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 교수 △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 △ 정희철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동향분석실장 △ 조장옥 서강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최원식 맥킨지 한국사무소 대표 △ 하영원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 △
한상만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
김현수 kimhs@donga.com·염희진·황태호 기자
김현수 kimhs@donga.com·염희진·황태호 기자
http://www.donga.com/news/home/article/all/20191209/98712406/1
https://m.blog.naver.com/haru8283/221675641402
ReplyDelete박정희가 200여명 성노예나 다름없는 피해여성분죄값 대대로 치러라!!대통령이 할 짓이냐 진실 밝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