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1, 2015

Day 32, Korea, 선영납골묘, 누나댁 방문. (11월29일, 토요일)

새벽같이 일어나 제수씨께서 아침을 준비 하시는것 같았다.  이렇게 일찍 하시지 않아도 될터인데....어젯밤 동생 막내와 나눈 얘기가 생각났다.   "형님, 내일 아침 일찍 출발을 해서 제가 누나댁까지 모셔다 드릴께요. "

며칠전 Laos를 떠나 고국을 향할때 막내와 연락을 했었다.  시골(선영)에 내려갈 계획을 얘기 했을때, 전국 사진촬영 대회가 있어서, 둘째날은 사진작가협회 심사위원으로 정읍에서 심사가 있는데, 그날은 같이 행동 하는게 어려울것 같아, 가는길에 정읍까지 Riding 해주고, 거기서 다시 뻐스를 타고 부안에 살고 계시는 누나 댁으로 가면 될것 같다고 얘기했었기 때문이다.

아침밥상에는 토란국, 호박죽, 현미밥 등등과 총각무, 김치도 있는 푸짐한 밥상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정성스럽게 잘 해주시어, 4개국 여행시 호텔에서 아침을 먹을때 잔뜩 먹었던 기분으로 많이 먹었다.  토란국은 옛날을 생각나게 하고도 남는, 어렷을적을 생각나게하는 독특한, 맛이었다.

차에 올라 동생이 정읍을 향해 운전하는사이, 나는 모자랐던 잠을 보충하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라는 소리에 눈을 뜨니, 선영을 모신 납골묘앞이었다.

내용이야 어쨋던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납골표는 번들 번들하고 보기에 좋았다.  묵념으로 인사는 대신했다.  몇년전에 선산에 모셔져 있는 선영님들의 묘를 파서, 이곳 납골묘에 모시고 일년에 한번 일괄적으로 제사를 지낸다는 설명은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다.  바쁜 현대인들의 생활여건이 납골묘라는 희안한 묘지 문화로 변형 돼가고 있는 고국 대한민국의 한장면을 여기서 목격한다.  조상님들의 묘를 파고, 뼈를 꺼내 화장해서  Urn에 모셔서 납골묘안의 선반에 모시는, 이런 엄청난 일에, 나는 철저히 외면(?) 당하는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오래전에 조상님들 묘앞에 상석을 교체 할때는 나도 동참하여 후손으로서의 의무를 당당히 했었는데.....









 여러개의 비문중에서, 하나의 조금만 비문에 새겨진 문구가 나의 마음을 서글프게 했다.  내용은 돌아가신 작은 형님과 그후손들, 그리고 나와 나의 후손들은 이곳 납골묘에 모셔질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왜 그렇게 선을 그었을까?  굳이 그렇게 비문에 새기지 않아도 결과는 똑같을 텐데..... 이비문의 문구에서 내시선이 멈춘것을 감지한 막내의 표정역시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의 후손중, 어느 속좁은 형제의 입김이 깊게 작용했음을 감지할수 있었다.

불과 몇분 이곳에 머물기위해 차를 달려온것이다.  조상님들께서 알고는 계실까?

다시 차를 타고 인근에 모셔져있는 둘째 형님묘소와, 큰 매형, 큰누나의 묘소도 참배했다.  큰 누나는 금년초에 돌아 가셨었다는 소식을 늦게 들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는 고국의 집안 행사에서는 제외되여 항상 후에야 알곤 했던, 일종의 Outsider로 인식되여 있는것으로 이해됐다.

누나댁에 도착 했을때는 마침 누나의 며느리도 토요일이라서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가 먼저 반가히 맞아 준다.  누나도 뒤따라나와 반갑게 맞아주면서 "너혼자왔냐?" 다.
시간이 짧아 나는 고향에, Lunar 역시 서울에서 혈육들 찾아 인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더니, 그래도 아쉽다는 표정이다.  누나의 키는 더 작아지신것 같았고, 노인티가 많이 났다.  허긴 80세가 됐으니 그럴수밖에..... 그래도 아직까지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고 계시는것을 보면 건강은 그런데로 우선 하신것 같아 좋아 보였다.

막내는 바로 정읍으로 되돌아 갔다. 고마웠다.  그가 사진협회 심사시간에 늦지 않을까 걱정되여 한마디 했더니, "괜찮아요. 같이 형님 모시고 돌아 다녔어야 하는건데....죄송해요" 라고 나와 누나에게 인사를 하고 차를 돌린다. 막내도 은퇴를 오래전에 했지만, 바쁜 삶을 살아가는게 보기에도 좋다.




바로 집앞에 있는 부안 재래 시장으로 누나와 같이 생선을 사러 나갔다.  시장의 전체적 모습은 그대로 였으나, 시장골목길은 Tile 을 깔아 아주 깨끗해 보였다.  신선한 생선들이 즐비하다.
"지금도 이렇게 많이 이곳에서 잡힙니까?"라는 물음에 "아냐 지금은 거의가 다 중국에서 들여온 생선들이 많단다" 라는 대답이다.

오랫만에 상봉하는 다 늙은 동생에게 점심을 먹이기위해, 더많이 늙으신 누나와 모처럼 학교일을 쉬고 있는 며느리까지 부엌에서 부지런히 움직이신다.  이런게 "혈육의 정"이라는 것인가.  어렷을적 어머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밑반찬을 비롯한, 고향의 맛이 묻어난 밥상이다.
누나와 며느님은 밥상에 마주 앉아, 숫갈을 뜨지도 않고, 나를 응시하면서 많이 먹으라는 재촉뿐이다.

점심후 다시 발길을 서울로 옮겨야 했기에 누나와 함께  Bus Terminal로 향하면서, 약국을 하고 있는 장조카(누나큰아들)에게 들렸다.  조카는 항상 웃는 얼굴이다.

누나가 Wicket으로 재빨리가서 뻐스표를 사오신다.  손에 받아 들면서, 어쩌면 다시는 살아생전에 볼수있는  Chance 가 또 올까?라는 상상을 순간적으로 하면서 누나의 얼굴을 다시한번 쳐다 봤다.  시골집에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길던, 건장한 처녀때의 누나 모습은, 이다음 세상에서나 볼수있게 된다는 상념에, 그리고 지금 다시 서로의 갈길을 향해 이별을 해야 하는 현실에 끌려가야하는 삶에서 가슴이 미여진다.  뻐스창을 통해 멀어져 가는, 할머니가된 누나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수가 없었다.

녹사평역에서 내려 발길을 남산 Tower쪽에 있는 친지의 집으로 옮기면서, US Military Barracks벽에 바짝 붙어서 진열되여 있는 항아리(Large Clay Pots)에 비친 불빛이, 오늘 하루 겪은 나의 마음을 꿰뚫어 읽고 있는것 처럼,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이곳 항아리는 오래전부터 진열되여,잊혀져 가는 조상님들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관리인이 바뀌면 우리의 삶처럼 역사속으로 묻혀질 것임을 암시해주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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