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04, 2014

Day 7, Minh Mang Tomb, 재래시장, 그리고 옛수도, Hue에서 Nguyen 왕궁 및 박물관 탐방, Viet Nam.

월남의 마지막 왕조는 Nguyen Dynasty였다고 한다.  이왕조는 1802년에서 1945년에 패망하기까지 143년간 월남을 통치했고, 왕위는 13대까지 이어졌었다고 한다.  이곳 Hue가 월남의 중앙 지점에 있었던점을 감안하여 도읍을 정한것으로 이해됐다.  도시의 풍경이 무척 조용하다.

 1858년부터 불란서가 Da Nang을 Beachhead로 월남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거의 100 여년을 통치하다시피하고, 왕조는, 특히 12대 왕은 자기를 보호해 달라는 조건으로 아예 월남을 통채로 불란서에 넘겨 주기로하고, 그후부터는 불란서의 꼭두각시 노릇만 하는 왕이었다고 한다.  왕조가 패망하면서 남북월남으로 갈라져 왔으나, 북쪽의 공산당이 통일을 하기위해 남쪽 민주정부를 베트콩의 게릴라 전법으로 공격을 가해오자, 남쪽의 월남정부가 무너지면 Indo-China에서 미국과 동남아시아의 다른 민주국가들의 안보가, 당시의 쏘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에 위협당할것을 염려한 미국이 마침내 1962년에 월남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전쟁은 1974년까지 계속되여 결국 초군사 강대국 미국의 체면만 구긴 전쟁으로 기록된바 있다.


 7층에 있는 내방에서 내려다본 거리의 광경이다.  이도시가 공업화가 안돼는 또다른 이유는 자연조건같다.  일년에 약 150일 이상이 비가 내린다고 한다.  습기가 산업화의 최대 악조건일것으로 보여, 자연적으로 이도시는 그반대격인 교육도시로 체면을 유지하는것 같다.

11층 식당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모습이다. 건물들의 키가 그만 그만이다.  아침은 북미대륙의 호텔에서 먹는 Breakfast와는 다르게 Dinner 이상으로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부페식으로 잘 써빙하고 있다.  오늘 점심은 밖에서 때워야 하기에 배를 더 든든히 채워두었다.



도시의 분위기는 무척 조용하고 공업시설은 거의 없었고, 고층빌딩 또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옛날에는 왕궁의 높이보다 높은 집짖는것을 허용하지 않았었는데 그영향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현재는 교육의 중심지로 더 이름이 알려져 있고,  Hanoi에 비해 무척 조용하고 교통체증도 없었다.

아침8시30분에 Guide, Mr.Yen이 우리부부를 호텔 Front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4킬로 외곽지역에 있는 Tu Hieu Pagoda로 향했다.  여기서 Pagoda는 불교사찰을 뜻한다.  이곳에서 Temple의 뜻은 Monastery의 의미로 사용되여 약간 혼동이 있었다.  입구에는 옛날 왕궁에서 내시(Eunach)로 근무했던 25명의 무덤이 사찰 입구에 있었다. 오래되고, 습하여 지금은 이끼만 잔뜩덮혀 있었고, 가끔씩 군데군데 향을 피워 그들의 넋을 기렸던 사람들의 흔적이 있었다.

건축물의 섬세함에 감탄이 나왔지만, 관리는 역시 "후진국입니다" 라는 말로 대변된다.
Nguen왕조의 2번째 왕, Ming Mang이, 아마도 서울의 종묘처럼 1대인 아버지와 후대 왕들의 영혼을 한곳에 보시고져 릉(Tomb)을 만들었던것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의 릉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사후에 도굴의 위험을 염려한 탓에 다른곳에 비밀리에 매장을 하고, 동원된 인부들 또한 모두 몰살시켰기에 현재까지도 묘의 행방을 알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중국 진시황제의 무덤을 산처럼 크게 만들어 사람들로 부터 산으로 오인받게 위장해 왔던 기록과 거의 흡사함을 느꼈다.
Ming Mang왕은 이 Tomb을 1841년에 시작하여 3년에 걸쳐 건설 했으나, 정작 본인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완성되기 1년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렸다고 하
월남은 자기네 본래 Langage와 문자가 있었지만, 기록을 보면 전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일반 서민들이 글을 깨우치면 자기네 입지가 흔들릴까 봐서 본래의 읽기쉬운 글을 사용하지 않고 어려운 한문으로 기록을 남긴 흔적을 보면서,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조 하실때도, 먹물들은 한글 창조를 반대 했었다.  천민들이 글을 깨우치면 자기네들 권위에 도전받을것을 두려워 했었던 점과 일맥상통하는 점을 발견했다.

이곳에서도, 또 앞서 보았던 Temple들의 구조는 대개 2개로 나누어져 있음을 보았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첫번째 Court Yard는 Ritual Yard이고,  2번째 Court Yard에는 Burial Yard이다.

Ritual Court Yard는 당시의 무사들과 정치인들이 주로 왕을 모시고 의식을 치렀던 곳이라고했다.  Burial Court Yard는 왕이 운명했을때 장례의식을 치렀던 곳이라고 한다.














Minh Lau는 '빛의집'의 뜻이라고 한다.  이집도 역시 목재건물인데, 특징이 기둥이 락카로 다 칠해져 부식을 방지하는것과 또 모양을 중시했던 흔적을 본다.





앞서 언급한데로, 아버지왕의 무덤이 색이 바랜 벽의 안쪽에 있다고 기록되여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빈 무덤, 즉 가묘라는 것이다.  확인할 기록은 없다고 한다.

두개의 높은 탑이  Burial Court Yard 건물 뒷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이탑은 밤이면 불을 켜서 길을 밝혔다고 하는데...... 어떻게 불을 켰을까?라는 의문만 더 남는다.




Tomb의 입구에는 다섯개의 돌로 새긴 동상이 있었다. 앞쪽에서 봤을때 왼쪽부터 2개는 문관들을 뜻하고, 나머지 3개는 무관들을 나타내는 긴칼을 차고 있는 동상이고 바로 그옆에는 코끼리와 말의 동상도 있다.  코키리는 전쟁에서 싸우는것을 뜻하고, 말은 운송수단을 의미한단다.

이번에는 25구의 Eunuch 의 영혼을 모시는 Tomb이 모셔져 있는 Tu Hiev Pagoda를 탐방 했다.  월남에서는 불교사찰을 Pagoda로 묘사하고, Temple은 왕을 중심으로 정치적 행사를 하는곳을 지칭한다.
Pagoda안에 있는 Pond에는 물고기들이 평생을 그곳에서 보낸다고 하는데 물의 순환이 없어 내가 보기에는 썩은물로 보였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것을 보면 썩은 물은 아닌것 같다.

Pond를 지나자 Eunuch 들이 모셔져 있는 Tomb이 눈에 들어온다.  봉분이나 장식물들은 이끼가 잔뜩끼어 Hue지역의 기후가 습한곳이라는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는것 같다.
25명의 내시중에서도 리더역활을 했던 분의 봉분이라고 했다.  앞에는 향을 피워 그들의 혼을 위로해주는 지역 관람객들의 불심이 깊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Gudie, Yen을 비롯한 이곳 월남인들의 불심은 대단한것 같다.  Eunuch들은 서민출신으로 평생을 신분때문에 남녀간에 환희를 느끼는 기능을 거세 당한채, 혼자 살면서 왕의 여인들을 지켜주는 임무를 하다가 생을 마감한, 따지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는것같다.
대웅전(?) 사찰안으로 들어서자 정중히 예를 갖춘다.  이사찰에 대한 전설을 설명해 우리에게 해준다.
가운데 불상 뒤에는 3개의 또 작은 불상이 있었다.  맨오른쪽 불상은 과거를, 가운데 불상은 현재, 그리고 나머지 불상은 미래를 나타낸다고 한다.  Incarnation의 뜻을 강하게 믿는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안의 뒷쪽에도 4개의 얼굴형상이 나타나지않는 불상이 있었다.  이곳에서 수도를 하다 열반한 스님들의 넋을 기리는 뜻이 그속에 있다고 한다.  같은 불교지만 이곳에서 보는 불상의 상징은 여러면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았다.

스님들이 수도사는데 시끄러운것을 금물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소리를 줄이기위해 쇠사슬을 지붕에서 부터 바닥까지 걸어놓아 빗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리도록한 지혜도 돋보인다.

이사찰에 대한 전설이 마음을 찡하게 한다.  처음 이곳에는 아주 작은 천막 사찰이 있었고, 그곳에서 6세의 어린 동자승이 어머니의 품을 떠나 수도를 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부터 80킬로미터가 떨어진 어머니를 만나러 오랫만에 고향에 갔는데, 그리워 하던 어머니는 중병에 걸려 거동조차 못하고 있었다.  급히 의사에게 진찰을 한결과 병명은 "영양실조"라고 했다.  어머니와 더 오래 살고 싶은 생각에 어린 수도승은 어머니를 모시고 되돌아와 사찰 옆에 모시고 수도를 정진 한다.  그후로 부터 주민들의 눈에는 이수도승이 밖에 나갔다 올때는 꼭  Butcher Shop에 들려 고기를 사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것을 수없이 목격하고 그는 이미 수도승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이를 왕께 보고한다.  왕역시 노발 대발하여 조사를 해보니, 수도승은 사온 고기를 어머니에게 봉양하면서 중병을 치료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왕은 벌대신에 수도승이 수도에 더 정진할수 있도록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의 건물을 지어주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이다.  공경을 몸소 실천의 본보기가 아니였을까?

대웅전 지붕바로 밑 처마속에는 벽화가 화려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림이 아니고 자기에 색상을 넣어 부친 조각품이라고 했다.  기후영향이 이런 지혜를 낳게 한것같다.
  
지붕 용마루의 용의 형상과 다른 모양은 중국에서 본것 보다 더 섬세한것 같다. 화려했던 옛문화의 흔적이다.  조국의 불교 사찰에서나, 건축물에서는 전혀 볼수 없는, 화려한 건축물이다.

사찰탐방을 마치고 공동묘지를 지나면서 서민들의 묘지는 어떨까하고 궁금증이 발동하여 차을 세우고 묘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예측과는 다르게 묘지마다 비석이 세워져 있었지만 관리는 거의 안하는것으로 보였다.

묘지에서도 있는자와 없는자들의 묘지 관리와 조성도 판이하게 다르다는것을 보았다.
Guide설명에 의하면 보이는 묘비들은 이름이 다 똑같다.  아마도 가묘를 만들어 놓고 다음에 필요시 사용하기위해 묘지를 확보해 놓은 것인것 같다는 설명이다.
우리가 오늘 이용한 승용차의 앞 대쉬보드에는 복을 빌어주는 뚱보불상(?)이 눈을 끈다.

재래시장을 구경하고 싶어 Favour를 구했더니 혼쾌히 응하여 서민들의 삶을 더 피부로 느낄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작은 삿갓을 여인네들은 머리에 쓰고 있었다.  1960년대말 월남전이 한창일때, 이모습을 많이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들은 낯에는 정부군편에 있다가 밤이면 출몰하는 베트콩들에게 협조하면서 살아가는 피곤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재래시장은, 여기 뿐만이 아니고,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시장과 다를게 없이 만물상들의 진열장으로 이해됐다.  한상점은 시계박물관처럼 세상의 모든 손목시계들은 다 모여있는것 같다.


햇볕이 뜨거운 이곳을 여행할때 꼭 필요할것 같아 값을 물었다. 겨우 1.5달러정도다.  그러나 이를 들고 다닐길이 너무나 멀어 아쉽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장바닥의 노점상 음식점에서 토론토에서 많이 보고 먹어본 쌀국수집의 국물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Guide에게 점심을 여기서 하고 싶다고 하니, OK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얼굴이 비친다. 혹시라도 후유증이 있을까봐서였다.  끓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것이기에 조금은 안심이 되여 부담은 됐지만 한그릇씩 주문했다.  맛이 그맛이다.  값은 1.5달러 정도.  옆에서 주민들이 우리보다 더 맛있게 먹고 있다.


일명 Forbidden Purple Garden으로 불리는 옛왕조의 궁전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입구에는 커다란 대포 4문이 진열되여 있었다.  4개는 4계절을 뜻한다고 한다.  대포한문의 무게가 자그만치 10톤이상이라고 하는데 전부 놋쇠를 부어 제조했다고 하는데, 재료는 서민들에게서 갹출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Court의 반대편에는 이와 비슷한 5개의 대포가 진열되여 있었다.  각포신은 또한 의미가 있었다. 첫째는 Metal(Gold), 물,나무,불 그리고 땅을 의미한다.

옛날의 왕궁을 외부적으로 부터 보호하기위한 방어책은 어느 왕궁을 보나 똑 같다.  즉 왕궁의 외곽벽밖에는 Moat가 있고, 그속에 물이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였다.
왕궁이면서 전략적 요충지( Fort)의 안쪽의 정문은 현재 보수중이었고,  건너편의 광장위에는 커다란 월남의 상징인 붉은색의 바탕에 노란별이 그려진 국기가 나풀거리고 있었다ㅏ.

'정오의 문('Noon Gate')의 간판이 중앙문에 새겨져 있다.  정부의 지원도 있지만 UN의 보조금이 많이 투입되여 수리중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본거처럼, 여기서도 3개의 문을 통과하여 맨 나중에 왕족이 살았던 살림집이 나온다.




왕궁의 건축물은 지붕에서 정교함을 또 다시 보게된다. 색상도 화려하다.  바로 도자기 만드는 사기를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왕의 사저가 있는 건물입구에는 9개의 큰놋쇠향로들이 진열되여 있고 이를 받치고 있는 받침다리는 전부 코끼리의 한부분을 묘사하고 있었다.  어떤다리는 코끼리 코, 머리, 다리 등등으로.












종묘처럼 왕들의 넋을 모시는 사당이다.  1884년 부터 1954년까지 불란서가 월남을 식민지화 하면서 7명의 왕의 영정을 모셨으나, 그들이 패하여 물러난후, 후세 사람들이 3명의생전의 업적이 매우 애국적인 영웅으로 인정되여 후에 같이 모시게 되여 현재는 10명의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나머지 3명은 아직도 이곳에 없었다.

Nguyen 왕조의 창시자인 1대왕의 영정이다.  흑백사진으로 그앞에는 향로가 있었다.

이 Corridor는 최근에 수리를 마치고 개방된지 약 6개월 됐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단청이 과연 얼마나 제모습을 오래 간직하면서 위용을 보여줄까에 관심이 모아졌다.

사찰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다. 지지목을 받쳐 보호하고 있는데,  이사찰은 1821년에 시작하여 다음해에 완성됐는데, Nguyen 왕조에 헌납됐다고 한다








건물의 벽에 새겨진 문양은 전부 사기그릇 조각들을 사용하여 만들었음을 확인했는데, 이방법만이 습기에 항상 젖어있어 부패가 쉽게 되는 것을 방지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것 같다.



 Citadal전체를 디지털화해서 해설해주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쉽게 더 이해할수 있어 좋았다. 이시설은 고국의 삼성에서 협조하여 만들어 졌다는 설명이 말미에 있었다.
Cital의 외곽 벽의 전체 길이(Perimeter)는 11킬로미터이고, 벽의 두께는 22미터, 높이는 6미터라고 설명한다.  안쪽의 Royal Wall은 4 Square 킬로미터이고, 벽의 높이는 4미터, 두께는 약 1미터라고 한다.  왕족이 거주한 Purple Forbidden City는 1.2 스퀘어 킬로미터에 벽의 높이는 3미터라고 했다.




왕궁안의 건물 기둥은 통나무를 깍아 세운 것인데 세월이 흘러감에 부식이 되여 일부건물내의 기둥은 보조 철기중을 받쳐주어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이상하게도 사진촬영금지 안내표지판이 있었는데, 후라쉬 없이 슬쩍 한컷한것이다.   보기에 안타깝다.
왕이 사용했다는 용모양의 옥쇄를, 나무를 이용하여 크게 확대한후 금칠을 해서 진열 시키고 있었다.  실제 옥쇄는 금으로 된것으로 무게는 16키로그람이였다고 하니, 늙은 왕은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을것 같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왕궁의 곳곳에서는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할수 있었다.  잘 마루리되기를 기원.



Royal Theatre 내부이다.  이곳에서 왕과 왕족들이 무희를 즐겼다고 한다.  모든 장식이 지금도 화려하게 간직되여 있다.  의자도 지금까지 보았던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위엄이 깃들여 있었다.

왕의 상징을 나타내는 조형물의 규모가 극장 전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  왕들은 정말로 이러한 장식과 대접에 만족한 삶을 살았을까?  100여년의 왕조역사에 13명의 왕이 있었다는것은 결코 그들이 장수 했다는 증거는 아닌것 같다.



저녁에 식사를 하기위해 호텔을 빠져나와 음식점들이 있는 곳을 찾아 가다가 생각지도 않게 한국음식점의 간판을 보았다.  Seoul Restaurant 다.  예상밖으로 젊은 친구가 주인겸 Manager를 하고 있었다.  이사업을 하게된 사연도 들려 주었다.
한국음식을 여행시작후 처음 먹어본다.  요즘의 현대식 한국음식이 아니고 토론토집에서,토론토 식당에서 먹었던 본래의 옛맛을 간직한 깊은맛이 있어 밥한그릇을 더 주문해서 먹었다.
국순당에서 제조한 막걸리도 팔고 있어, 곁들였다. 역시 시골맛을 풍기는 어쩔수 없이 나는 토종 한국인임을 또한번 느끼게 해주는 막걸리 맛이었다.  마침 한국에서 관광온 일단의 아주머니들이 우리 옆좌석에서, 우리처럼, 저녁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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