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모두가 재향군인회 해외지부의 회장들로 이번 본국에서의 모임에 참석하고, 안보차원에서 이곳을 찾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원래 1번 국도는 목포에서 시작되여 북쪽의 신의주까지 연결된 도로라고 한다. 이 도로는 오래전 "정주영"현대구룹 창시자께서 소 1000마리를 직접 이끌고, 이곳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넘어갔던 도로였었다라고 설명을 부연해 준다.
이에 앞서 판문점에 도착하기전 뻐스창으로 멀리 내려다본 두개의 국기 계양대가 커다란 Flag 를 펄럭이면서 서로 '기' 싸움을 하는것을 본기억이 떠오른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가까이 보이는 마을은 '대성동', 우리 조국쪽에서 관리하는 마을이고, 건너편쪽은 북쪽에서 관리하는 '기정동' 마을이라고 한다. 국기 계양대에 대한 설명에서 북쪽의 선전이 얼마나 허구에 차있는가를 금방 알수 있었다. 즉 기정동마을에 서 있는 국기계양대는 높이가 160미터, 거기에 매달린 flag는 무게가 230킬로그람, 조국 남쪽의 '대성동'마을에 있는 계양대는 높이가 100미터, Flag의 무게는 100킬로 그람 이라고 한다. 속빈 강정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북쪽의 참상인데, 이렇게 기를 쓰고, 남쪽보다 더 크고 높게 유지 하는 그목적이 어디에 있으며,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는가? 계양대에 매달린 Flag는 비바람에 시달려 금방 망가지기 때문에 25일마다 바꾸어 달고 있으며, 그비용은 관할 구역인 파주군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평화의 집을 통해 말로만 들어왔던 38선이 지나는곳에 아담하게 서있는 6채의 가건물이 보이는곳에 안내 됐다. 지붕의 색갈이 3동은 Green이고, 다른 3동은 Silver였다. 3동은 조국대한민국의 재산이고 다른 3동은 북쪽의 재산이라고 했다. Green색의 가건물에서 군장성급들의 고위회담이 열렸었다고 하는 곳에 안내되였다. 주의 사항이 참으로 많다. 북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권총을 뽑아들고 사격을 하는것으로 오인 할수 있기 때문이란다.
건물중앙에 회담용 테이블이 있고, 그가운데로 마이크선이 놓여 있다. 그곳이 바로 38선이라고 했다. 전에는 선을 넘어, 같은 건물안이지만, 북쪽 관활에 갈수없었지만 지금은 이건물안에서는 마음데로 움직일수 있다고 했다. 대신에 북쪽이 관리하는 건물에는 남쪽에서 들어갈수 없는, 협약아닌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물안에는 우리측 헌병이 독수리의 눈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신체도 건강하고 믿음직 스러워 보여, 마음이 놓이게 해준다. 전에는 미군이 경비를 섰으나, 업무이관으로 지금은 완전히 우리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유엔군 장성과 북측의 장성이 이 테이블에 마주앉아 협상이 시작되면 서로간의 인사도 없이 각자 독설이 포함된 할말만 토해내고 헤여지곤 했었던, 그현장에 지금 내가 서있다.
북측의 판문각은 조용하고, 두명의 경비병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병사는 Binocular 를 통하여 남쪽을 경계하고, 한병사는 부동의 자세로 서 있다. 왜 저쪽은 조용한가?라고 묻자, 안내병의 설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우리측도 마찬가지이지만, 관람객이 있을시에만 북적거린다고 한다.
미류나무사건을 설명해 준다. 내가 이민오던 그해에 있었던 도끼만행의 참옥함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에는 판문점 공동구역안에서는 북측경비병과 유엔군 경비병들이 뒤엉켜 경비를 서고 있어 남측구역에 북측의 초소가 여러개 있었고, 남측또한 유엔군 초소가 북측에도 있었다고 한다. 북측지역에 있던 유엔군 초소와 바로 남쪽에 있는 유엔군 초소 사이에 큰 미류나무가 자라고 있어 두초소간에 시야가 가려 경비에 어려움을 겪자, 유엔군측에서 사전에 북측에 통고를 하고, 유엔군측의 경비중대장 '보나파스' 대위의 지휘하에 유엔측 경비병들이 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북측 경비병들이 나타나 항의를 하면서 중대장 보나파스와 Barret 중위를 도끼로 찍어 죽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간 사건으로 당시에 한반도에 긴장을 초고조로 조성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에 초소를 비워두고, 지금은 경비 카메리로 대체하여 경비를 서고 있다고 했다. 지금 계산해보니 벌써 37년이 흘렀다. 무상한 세월.....
지금은 공동구역 경비를 유엔군측에서 한국군에 2004년도 부터 이관하여 JSA구역은 한국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어느면에서는 더 든든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양측 경비병들이 같이 경비를 했었다고 한다. 북측과 남측의 최가까운 경비초소는 약 25미터로 뻐스 두대의 길이만큼 간격을 두고 서로 응시하고 있다고 했다.
북측의 '기정동'마을은 2004년에 개성공단이 가동하기전까지는 선전용으로만 이용되여 주민들의 거주가 없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것으로 파악되고 있다한다. 아마도 남측의 '대성동'마을이 항상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면서 농사를 짖는 모습을 보고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겉모습 부터가 경직되여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남측의 '대성동' 마을은 겉으로 보아도 모든게 풍부해 보였다. 주민들은 우선 정부에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한다. 마을 주민들은 6/25 이전부터 살았던 주민들이 그대로 대를 이어 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새로이 입주하여 살수 있는 자격은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게되는 경우에만 배우자가 외부에서 들어와 거주할수 있으며, 이곳 주민이라 해도 8개월 동안 대성동마을을 떠나 살게되면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고 했다. 단 외부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라고 한다.
주로 농사를 짖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모두가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각가정은 논 3만 평방미터, 밭 3천평이상을 소유하고 있어 년간 수익이 가정당 약 7천 내지 1억 5천만원 정도되며, 생산품은 모두 관할농협을 통해 팔린다고 했다.
판문점 휴계소 바로 오른쪽에는 북한이 파놓은 지하땅굴을 관람객들에게 관람시키고 있었다.
지하 깊숙히 북측에서 땅굴을 남쪽을 향해 파놓은 비밀 통로가 별견 됐을때 남한 전체가 떠들썩 했었지만, 지금은 관람객들에게 안보교육 훈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것 같아 든든했다. 북한 병사들이 고난에 시달리면서 굴착작업을 하는 Mockery가 보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설명에 의하면 북측은 유사시 이통로를 이용하여 삼십분만에 일개 사단병력을 남파할수 있다는 것이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그들의 꿈이 얼마나 허망한짖인가를 전세계가 비웃고 있는가를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지하 땅굴이 한개가 아니고 발견된것만 여러개라고 하니.....
북쪽의 판문각은 오히려 남측의 통일의 집보다 더 반듯하게 지어놓았다. 여기서도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 해서 뭘 얻을것인가? 바로 그뒤에는 굶어 죽어가는 주민들이 목에 넘길 풀뿌리를 찾아 민둥산을 헤메고 있는데.... 언제 이러한 비극이 끝날까?
안내 경비병은 육군 신참내기 였지만, 아주 질서정연하게 설명을 해주어 이해도 쉬었지만, 자신있게 경비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들 때문에 후방에서 국민들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해 하고 있을까?
도라산역사에는 몇년전 미국 대통령 Junior Bush께서 판문점을 방문하고 이곳을 방문하여 기념으로 짧막한 Rail조각에 서명한것을 진열해 놓은것을 보았다. 또 며칠전에는 서울에서 핵안보에 관한 세계정상들이 모여 회담을 한후, 오바마 대통령이 이곳 판문점을 방문했다는 설명도 있었다. 세계최강의 국가 원수들이 이곳을 가끔씩 방문했다는것은 그만큼 이곳이 지구상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곳이라는점을 알수 있었다. 도라산 역사안에는International Airport에서 custom clearance를하기위해 검색대를 지나는것 처럼 설비를 해놓고, 남과북이 합의 하여 남북간에 선로를 연결하여 처음 몇년 동안은 이곳으로 부터 개성공단까지 열차가 상징적으로 하루에 한두번 운행될때, 이곳 검색대를 이용했었다는 설명도 있었다.
지난해 중국, 홍콩, 마카오 그리고 타이완을 여행하면서 느끼고 부러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들 4개 국가는 정치적으로는 다른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껄끄러운 관계에 있기도 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이들 나라를 여행하는데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데로 드나들고 있는 현장을 보았을때의 기분을, 지금 이곳에서 되뇌이면서, 특히나 타이완과 중국은 서로 적대관계이면서 정치적으로 서로 비난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은 합당한 여권을 소지 하면 마음데로 왕래를 하고 있음이 무척 부럽게 또 기억에서 떠 오른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