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06, 2011

Trudeau를 내나름대로 재조명해 본다.(Aug 5,2011)

Trudeau를 내나름대로 재조명해 본다.(Aug 5,2011)

"I had absolutely no desire to give in to such a ridiculous display of violence. I detest violence. As a democrat, I will never accept that a small group of agitators can make someone invited by majority take to his heels by throwing a few stones at him."

"When you have been elected to govern,you have to do so to the best of your ability without worrying about the condemnation your actions. What was important was to prevent the situation from degenerating into chaos, and the conduct of the elected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from being dictated by terrorists"

"The first duty of government is to govern" which means never giving in to chaos or terror.

Pierre Elliot Trudeau는 내가 처음 이곳 캐나다땅에 이민으로 왔을때 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가이면서 Playboy로 스캔달이 꼬리를 물고 있었고, 최장수 수상을 하고, 총각수상으로 명성을 떨치다가 막 결혼한지 몇년 안된 신랑으로서 신혼의 단꿈을 꾸면서,아들 3명을 년년생으로 뽑아내고, 그러면선도 캐나다 정계를 주무르고 또 미국도 아직 모택동 휘하의 중국과 정상외교를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때, 중국으로 날아가 당시의 모택동 주석과 수상 주은래를 만나서 양국의 현안을 논의 했고, 또 주은래가 안내인이 되여 중국의 유명 관광지를 구경까지했던 독특한 인물로 요약되는, 내가 미쳐 알지 못했던 삶을 살았다는것을 재조명하게 됐다. 위에 적은 문장은 그가 직접쓴 Memoirs중에서 그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잘 나타낸 문장으로 요약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면과 맥을 같이 하는것 같아 옮겨 놓은 것이다.

그의 Memoirs을 읽으면서 막연히 알고 있던, 또 주위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그대로 받아들여 기억하고 있던 그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끗히 일소하는,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내나름데로 재평가할수 있는 기회를 내가 포착할수 있도록 해준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의 정치적, 인간적 사상은, 그가 카리스마적이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존중했고, 그가 수상으로 재직중, 역사에 남을 획기적인 개혁들을 했거나 지금까지 없었던 Unemployment Insurance, Health Insurance, 투표권을 21살에서 18세로 내렸고, 캐나다 국기(flag)를 공식화 시켰고, 당시
영어가 공용어였던것을 의원들을 설득하여 영어와 불어를 공용어로 하도록 하는 Bilingual language정책을 세웠었고....Minority Government를 이끌어 가면서도 장수 할수 있었던 그의 용병술등등 그의 처세와 능력은, 우연히 그가 똑똑해서 발휘됐던 것이 아니고, 학생시절때부터 이미 그는 그런길을 걷기위한 체험을 몸소 했었기 때문에 가능 했음을 알수 있었다. 마치 그가 세상에 태어난것은, 캐나다의 정치적 후진성과 캐나다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여 선진국으로 이끌어 놓기위해 이미 점지해 놓은 삶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의 인간적 성격과 정치적 색갈을 나는 좌파성향이고 공산주의 기질이 있어 미국의 정책에 사사건건히 반대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내 생각이 편견이었음도 이번에 깊이 깨달았다. 그의 인생관과 정치적 성향은, 미국의 공화당이 주창하는 보수색갈을 싫어하고, 그래서 좌파성향이 짙게 보이면서도 공산주의와 교류는 하되 절대로 공산주의를 싫어 했음을 알수 있었고, 절대 다수가 지지하는 정책을 소수의 극렬분자들이 반대하고 난동을 부리는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서는 군대까지 동원해서 말살시키는 단호한, 결단력있는 정치가 였음을 새삼 발견하면서, 오늘날 조국의 일부 좌파 극렬분자들이 무정부 상태를 만들정도로 난동을 부리는것을 보면서도, 강력 대처를 못하는 정부와 정치꾼들을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Trudeau의 Memoirs를 한번 잃어 보고, 국민이 세워논 지도자로서의 갈길과 할일이 뭔가를 분명히 공부 하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나의 망상일까? 그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뒤따라 가면서 간략히 적어 본다.

그가 아직 대학생 시절에 그는 보통의 젊은이들은 꿈도 꿀수 없었던 모험을 즐겨 하면서 담력을 키웠던 것으로 이해를 할수 있었다. 단짝 친구 Guy Viau와
Desrosier의 사촌들과 같이 어울려 Hudson Bay까지 가기로 하고 수로를 따라 Ottawa강에서 부터 시작하여 수백마일을 지나 Lake Timinskang을 거쳐 James Bay까지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시 Canoe를 타고 온타리오 북쪽 끝에 있는 Cochrane까지 가서 그곳에서 Hudson Bay까지 사투를 벌이면서 노를 저었고, Montreal대학에 다닐때 오늘날 자동차로도 하루가 더 걸리는 먼거리에 있는'가스페'반도로 배낭짊어지고 Trail Walk을 하는 끈질긴 그의 성취욕과 집념 그리고 탐험심을 볼수 있었다.

1917년에 캐나다에서 Conscription때문에 퀘백에 거주하는 불란서 계통의 주민들이 주동이 되여 폭동을 일으킨 역사를 알고 있던 그가 대학생 시절에,
퀘백주의 한 보궐선거에 집권당인 자유당에서는 당정책으로 징병제를 주장하면서 캐나다군 소장 출신을 영입하여 후보로 내세우고, 이에 맞서 싸우는 야당에서는 젊은 변호사인 Mr. Drepeau를 후보로 내세우면서 선거전을 벌일때, 그가 처음으로 대중앞에 나서서 야당후보를 지지했던 연설을 했었던 점을 보면서 그는 처음부터 Liberalism을 주창하는 자유당원 기질이 있었으면서도 야당을 지지했음도 알았다.

그가 대학생때는 원하든 원치않던 징병제도를 피할수 없었음을 알수 있었다. 징병제를 피하여 대학에 가도, COTC( Canadian Officers Training Corps)제도가 있어 일주일에 두번씩 인근의 군부대에 가서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을때, 그는 훈련중 파생되는 언어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것을 알수 있다. 후보생 대부분이 불란서말을 하는 불란서계통의 후손들인데 교관은 영어로 훈육하는, 질문도 영어로 해야하고, 다시 자유시간에는 불란서말로 교제를 하는 모순된점에 착안하여 1/3 이상의 인구분포를 갖고 있는 불란서말을 공식적으로 아무런 구애 없이 사용할수 있는 방법을 구상했던 것으로 이해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Harvard로 건너가 MBA를 했고, 다시 불란서, 영국으로 가서 수학하면서, 오늘날 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관계로, 서구인들에게는 낯설기만 했던 아시아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소위 말하는 배낭 여행을 하면서 가난에 찌들고 외부세계를 잘 모르는 현지인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을 이해 했고, 시리아를 방문했을때는 턱수염을 기른 모습에서 이스라엘의 스파이로 몰려 유치장에 갇히는 경험도 했었고,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오늘날의 화약고와 같은 인도,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중동지역과 그리고 버마를 비롯한 인도 차이나 지역의 나라들을 돌면서, 이들을 포함한 전세계를 위해 그가 할일이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경험을 체험하는 그의 원대하면서도 독특한 내면을 볼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그만한 배경과 학력이라면, 귀국하여 편하게 일자리를 찾아 편한 삶을 살면서 인생을 Enjoy할만도 했을텐데....이러한 체험에서 인간 모두가 잘살수 있는 인생관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정치적 색갈로서의 좌파성향과 Liberalism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해석도 나름데로 해봤다.

1970년대초에 퀘백주에는 과격한 퀘백분리주의자들이(FLQ) 퀘백의 독립을 외치면서 폭동을 부리고, 그의 친구이자 외교관을 납치하여 살해하고, Canada 주재 영국외교관을 납치하여 협상을 요구할때, 이들의 주장을 단호히 거절하고, 수상으로서 그에게 국민들로 부터 부여된 책임과 권리를 신속히 행사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그들을 일망타진하고, 소수의 Agitator들이 터무니 없이 주장하는 결과가 어떤것인가를 극렬하게 보여준 소신있는 정치가임을 깊이 느꼈다. 민주주의라는 기치아래 유권자들을 너무 의식하여 부여된 의무와 책임을 유야무야 하는식으로 얼버무리고 그순간을 넘기는
요즘의 정치꾼들에게, 꼭 필요한 정치가로서의 그의 소신을 한번씩 연구해 보기를, 권해 보고 싶다. 특히 고국의 정치판을 보면서 몇명의 좌익 극렬분자들 때문에 수천억을 들여서 벌이는 국책사업이 흔들리거나 지연되는 현실을 보면서, 더 우스꽝 스러운것은 야당의 리더라는 자들이 이들과 합세하여 같이 북치고 장구치는 역적질을 하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되며, 이를 지켜만 보는 소신없는 정부와 여당 지도자들은 뭘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들이 그들에게 권한을 위임 했을때는 꼭 좋은역만 하라는뜻으로 준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국익에 반하는 행동과 선동을 하는자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척결하라는 깊은 뜻을, 다음에 닥쳐올 선거때를 의식한 한표에 너무나 매달려서, 박력있게 수행하지 못하고 대의를 그르치는 망국적인 행동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점이 두렵고 무섭게 느껴진다. 박통같은, Trudeau같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직책을 수행하는 책임자가 없다는것이 오늘날 조국의 한계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모택동 정권하의 Red Army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으면서 외부세계와 단절하고 있을때, 그는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계획을 알게된 미국정부는 그의 중국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밀어부쳐 모택동과 주은래 수상과 만나서 현안을 협의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당시만 해도 비밀에 싸여 있다시피 했던 중국의 이곳 저곳을 막 결혼한 그의 부인과 같이 관광까지 하는 외교수단을 보이면서 동서 냉전의 해빙을 위한 물꼬를 텃던것도 그의 기록으로 남을것 같다. 그후 핑퐁외교를 통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 Trudeau의 중국방문은 당시로서는 크게 언론에 부각된 기억이 없지만, 닉슨의 중국방문은 '핑퐁외교'라는 수식어를 달면서 전세계의 뉴스 거리가 되기도 했었던 기억이있다.

그가 수상으로 2기 집권때는 소수당 정부여서, 의회에서 보내는 하루가 편한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중간에 좌초하지 않고 연명할수 있었던것은 그의 정책노선이 우파가 아닌 좌파성향과 liberalism이 깊은데 그이유를 들수 있을것 같다. 그가 추진하는 정책이 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NDP의 정책과 맥을 같이 했기에 그들의 지지을 얻어 정권을 연장 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만약에 그가 우파를 지향하는 정치색채를 띄었었다면, 9개월만에 좌초했던 Joe Clark의 보수당과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타고 그의 정책에 다 동의 하는것은 아니다. Social Benefit을 지향하는 그의 정책추진은 지금에 와서는 정부에 큰 부담이 되고, 이를 수정할려고 하면 이미 이러한 타성에 깊이 물들여져 있는 국민들의 동조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큰이나 어렵다는점을 볼때, 결국 일하기 싫어하는 일부 국민들의 혜택을 위해 다수의 국민들이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병폐가 되고 있는점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하겠다. 나자신 현재 은퇴생활을 하고 있지만, 수입의 2/3 이상 정도는 직접세 간접세등으로 정부에 바치고 있음을 보면서 깊이 느끼고 있는 점이다. 그많은 세금을 내가 직접 나 자신을 쓸수 있다면 여유롭게 세계 여러나라를 구경하면서 은퇴생활을 음미할수 있을텐데..... 그러나 공산주의를 단호히 거절하는 그의 좌파성향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진보좌파 성향도 더욱아닌 애매 모호한, 그러면서 이북의 Kim's Regime에게 선을 못대어 안달을 하는 고국의 사이비 정치꾼들과는 그래서 뚜렷히 구분이 된다.


캐나다 수상으로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을 만나면서 그나라 사람들의 민족성을 파악할수 있게 한점도 흥미롭다.
먼저 이스라엘민족의 거만함과 목적을 위해서는 협박도 서슴없이 한다는 면을 보여주는 예를 보면, 그가 Menachem Begin 수상과 정상 회담을 할때 이스라엘 수상이 Trudeau에게 캐나다의 대사관을 텔아비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는 당장에 반박을 했었다. 즉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니고 점령지일뿐이니, 그렇게 할수 없다고 하자, Begin이 협박을 한다. 즉 토론토에 모여 살고 있는 Jewish들에게 이러한 당신의 생각을 얘기해서 다음 선거에 영향을 주겠다고 한것이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몬트리얼의 내 선거구인 Royal Mount에도 Jewish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당신과 같은 의견을 갖고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니 맘데로 하라고 응수 했었다. 그후 Joe Clark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사관이 옮겨지게 됐던 것이다.

인도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거짖말쟁이라는것을 잘 나타낸 부분도 재미있다. 캐나다가 캔두기술을 인도에 전수해 주면서 평화적 이용 즉 전력생산에만 사용하기로 '인디라 간디' 수상과 합의했었다. 그후 몇년이 지난후 인도의 원자폭탄생산의 낌새를 알고 "왜 폭탄을 만들려고 혈안인가?" 라고 하면서 힐난하자
인도수상은 "산이라도 필요할때는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응수 당하자, 크게 배신감을 느끼고 좀더 신중했어야 했음을 시인한 점이다.

큐바의 '카스트로'는 선동적인 대중연설가로 유명하지만, 사적으로 만나면 말이 없고, Skin diving을 매우 좋아해서 큐바 방문시 같이 격의 없이 Skin Diving을 즐길 정도로 친했으나, Angola 내전시 큐바군을 파견한것에 항의 하자, 약간명의 군대가 주둔해서 그들을 도아주고, 임무가 끝나면 곧 철수 할것이다라고 말한 카스트로의 말을 믿고, 귀국하여 확인해 보니 그와는 반대로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앙골라내전에 간섭한것을 확인하고 Warning했으나, 이를 무시하자, 곧바로 모든 원조를 끊고, 인도적 차원의 원조만 남겼던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속성이 뭔가를 잘 보여 주는 증거로 이해 할수 있었다.

중국 방문시 모택동을 만나야 하는데, 확실한 언질없이 수상 주은래와 협상을 하는 도중에 주은래의 보좌관이 들어와 귀속말로 몇마디 속삭인후, 주은래는 오늘 정상 회담은 여기서 끝냅시다 하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면서, '구경 갑시다 내가 안내 하겠소'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의견은 물어 보지도 않는 결례를 아무렇치도 않게 행하면서 행선지도 말하지 않은채 차를 몰았는데, 한참후 어느 큰집에 도착하여 안내 되였는데, 모택동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Trudeau를 반기면서 예의를 차렸는데, 모든 유리창에는 커텐으로 가리워져서 밖에서는 안을 볼수 없게 했는데, 이는 사진사가 모택동의 사진을 잘 찍게 하기위한 것이었음을 알면서 공산당조직의 가면을 보았고, 당시 실각하여 초야에 묻혀 있던 등소평에 대한 트루도의 의견을 받아 들여서 였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이틀후 등소평이 복권되였음을 알려 주었는데, 오늘날의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강하게 하는 초석을 다진 영웅으로 그는 크게 쓰임을 받은 인물이 된것인데, 하마트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번한 그를 트루도와 연결시켜서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점도 공산주의자들의 예정에 없는, 오직 권력갖은자의 마음에 따라서 곧 법이요 국가라는점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는것 같기도 했다.

그가 강력한 연방주의자임을 잘 증명하는 면을 캐나다헌법을 영국으로 부터 받아올때에 일어나는 집안 싸움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캐나다의 강력한 연방제 헌법을 영국으로 부터 가져 오는데도 연방정부와 주정부들 사이에 피터지는 싸움이 몇년동안 계속되는 어려움을 거쳐서 마침내 캐나다인들의 품에 안기게 되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내용은 Memoirs를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었다.
헌법을 영국으로 부터 patriation 하는데 10개의 Province 가운데, Ontario, New Brunswick주만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나머지 8개주 수상들은( Gang of Eight) 연대를 이루어 캐나다 헌법을 가져 오지 못하게 하거나, 가져와도 각주에 더 많은 Power를 포함 시켜야 한다는 전략아래 세가지 전략까지 만들었었다.

첫째는 Trudeau정부가 영국에 가서 협의 할때, 그들도 런던에 가서 로비활동을 한다, 특히 퀘백은 많은 예산을 들여, 공짜로 대접받기 좋아하는 영국의회의원들을 상대로 향응까지 베풀었었다. 이계획이 실패할경우에는...
둘째는 이 로비가 실현 안될때, 각주수상들은 Constitution patriation 은 불법임을 빙자로 법원에 연방정부를 제소 하는 계획을 세우고, 마니토바와 퀘백주법원은 캐나다 헌법 Patriation은 합법으로 판정을 내렸고, 뉴펀드랜드주는 불법으로 판정, 결국 캐나다최고법원에 까지 가게되는 길을 만들었고, 연방의회에서는 당시 야당으로 있던 PC가 이에 동조하는뜻으로 Filibuster를 이용하여 시간을 끌었었다. 이계획이 실패하게 될경우에는
세번째 각주수상들이 대국민 설득작업으로 유세를 편다는 전략까지 만들었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 마침내 1982년 4월 영국여왕의 친필서명이 들어 있는 헌법을 갖게되었다. 이 작업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 3명의 여성을 그는 감사해 하고 있다고 강조했는데, 영국여왕, Margaret Thatcher 영국수상, 그리고 영국주재 캐나다의 High Commissioner Jean Wadds 이다.
이러한 어려운 고비를 거쳐 마침내 캐나다가 자체 헌법을 갖게 됐는데, 자체헌법을 받아 올려는 노력은 1927년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Trudeau의 손을 거쳐 그꽃을 피우게 된것이다.

그가 수상으로 재직하면서, 지금까지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고위직에 문호를 개방한 최초의 기록을 세운것도 흥미롭지만, Individual freedom과 남녀평등을 행동으로 보여줬다는데 그의미가 높다 하겠다. 최초의 연방국회의장, 최초의 주총독, 최초의 대법관, 최초의 고등법원장, 최초로 Jewish 출신 연방장관, 최초의 French-Canadian출신 연방 재무장관과 상무장관, 최초의 Aboriginal 장관, 헌법에 원주민의 권리와 존재인정 삽입.



은퇴후 그의 아들중 막내가 BC주의 Rocky 산맥의 스키장에서 사고를 당하여 목숨을 잃는 비극을 맞이 하기도 했는데, 이는 몸으로 부딪혀 담력을 기르는 아버지의 기질을 아들에게서 그대로 보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건강했던 그가 이런 비극을 극복하는데 많이 힘들어 했었기 때문에 그가 몇년후 믿어 지지 않게 세상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된것이 아니었을까?라는 그의 아픈면을 읽을수 있었다.
http://www.latimes.com/news/opinion/commentary/la-oe-lee-pyongyang-
ploy-20110805,0,6143195.story

http://www.cp24.com/servlet/an/local/CTVNews/20110807/110807/20110807/?hub=CP24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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