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0, 2009
상하이(Shanghai)여행 이모저모
상하이, 중국의 현대판 도시중 제일 규모가 큰 도시라고 한다. 우선 규모에 놀랐다. 인구가 약 17백만명쯤 된다고 했다. 길거리를 걸을때 어깨와 어깨가 부딪치는 서울의 거리가 복잡하고, 교통이 막혀 약속시간을 지키기 어렵다고 하는 우리의 조국 서울의 인구가 약 1천만명쯤 된다고 들었는데.....17백만명이 모여 사는 곳이라니.....우리의 여행팀은 전부 26명으로 그중 우리친지는 5명이었고, 여행 가이드는 현지인으로 연변에서 자란, 우리교포로 그곳에서 교육을 다받고, 좀더 좋은 생활을 추구하기위해 상하이로 진출하여 여행업에 종사한지 약 4년이 지났다고 설명하면서 이번에 우리와 조우한 것인데, 그의 언어는 약간 어눌한것 같았지만, 액센트는 심한 이북말씨였다. 표현도 이북언어였다.
거대한 중국땅에는 행정적으로 23개주와 4개의 직활시에 그리고 5개의 자치구로 편성돼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상해는 또한 정치도시요, 경제 도시라고 하는데, 이곳의 경제규모는 중국전체 인구 14억이 생산하는 GDP의 1/20을 상회하는 큰규모라고 한다. 중국에는 56개 소주민족으로 구성되여 있는데 그중에서 한족이 전체인구의 약 93%를 차지하고 있으며,나머지 7%가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이라고 한다. 우리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연변은 약 15만명이 있는데 이는 연변주 전체 인구의 약 36%정도로, 이는 자치주로서의 자격이 되기위한 51%가 안되지만, 중국정부에서 예외규정을 두어, 연변족 자치구로 인정해 주고 있다고 한다.
상해시를 가로 지르는 황포강은 그밑바닥이 뻘로 형성되여 있다고 한다. 황포강 건너편은 건설의 역사가 30년, 그반대편은 100년이 된다고 한다. 뉴욕맨하탄 처럼 마천루가 끝도 없이 보이는 강건너편은 지난 30여년 동안에 이루어진 상업지역이라고 하며, 구시가지는 지난 100 여년동안에 이루어진 도시라고 한다. 상해시는 제주도보다 약간 남쪽에 위취해 있으며, 습기가 많아 대부분의 주택은 2층 이상으로, 1층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다. 상해에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알고 있는 윤봉길의사가 포탄을 투여했던 노신공원이 있다. 중국의 기념비적인 인물인 그의 이름을 따서 노신공원으로 부르고 있는데 우리한테는 홍구공원으로 더 알려져 있다. 윤봉길 의사가 투척했던 자리는 화초로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주위는 접근을 방지하기위해 울타리가 되여 있었다. 수많은 군중으로 쌓여 있는 속에서 폭탄을 꺼내 던졌을 당시의 윤의사의 기상을 잠시 목을 숙여 생각해 보기도 했다. 몇년전만 해도 윤의사를 기념하기위한 아무런 표시가 없다시피 했으나, 약삭바른 중국정부가 쏟아져 들어오는 한국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기위해 기념비도 세우고, 임시정부로 쓰였던 연립주택의 한동을 당시의 사무실과 부엌등등의 구조로 재구성하여 관람 시키고 있었다. 임정 사무실안에는 임정수반 김구가 사무실에서 집무하는 모습과 그앞쪽 책상에는 비서겸 사무원이 업무처리하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으며, 복도에는 김구선생님의 조그만 흉상이 진열되여 있어 당시를 회상할수 있도록 했다.
상하이는 습하고 햇볕드는날이 드물어, 해가 밝게 비치는 날에는 밀집한 지역의 높은 아파트에서는 긴장대를 이용하여 빨래를 말리고 있는 장면이, 특히 여성의 속옷도 거침없이 말리고 있는 장면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게도 할것 같았다. 어느면에서는 도심속의 후진국 시민들의 생활의 한면임을 웅변해 주는것 같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비가 있는 넓은 홍구공원을 걸으면서, 많은 시민들이 녹음기를 틀어놓고 음악에 맞추어 집단 체조를 곳곳에서 하는 장면이 이채로웠다. 몇년전만 해도, 공산체제를 반대하는 간접행동으로 보여 당국의 감시와 처벌대상이 됐었는데.....여유롭게 노년의 삶을 율동으로 즐기는 그들의 변화에, 정치이념은 보통시민들과는 무관한것 같음을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
황포강 서쪽은 '포서' 동쪽은 '포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포강 밑으로는 9개의 터널이 뚫려 교통의 동맥역활을 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상하이에는 17개의 지하철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중국의 심장역활을 주야로 하고 있었다. 상해 신천지라는 한구역을 가이드를 따라 구경했다. 이곳에는 세계 각곳의 문물이 집결되여 있었다. 과연 세계의 젊은이들의 주무대가 되고 있음을 그곳을 방문하고 있는 각양 각색의 모양을 보이는 젊은이들로 부터 느낄수 있었다. 상하이 중심부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수 있는 '동방명주탑'에 오르기 위해 약 1시간 30분 정도 line-up했다가 겨우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두번에 바꾸어 타고 관망대에 올라서 내려다 본 황포강은 탑을 중심으로 두갈래의 갈색물 강줄기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고, 그물줄기위로 셀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배들이 화물을 싣고 오르내리는 장면이 상하이가 심장부임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았다. 황사현상이 심해 관망대 주변의 도시만 볼수 있었지만, 도시의 규모가 과연 중국이 대국임을 증명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관광객의 대부분은 중국인들이었으며, 한국 관광객들의 수도 엄청났다. 차량의 물결은 끝이 없다.
밤에는 '운봉극장'에서 유명한 서커스를 구경했다. 손바닥에 땀이 흐를정도의 아슬아슬한 묘기를 보여주는 무예들의 Performance에 감탄을 연발하다보니,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접시돌리기, 지구본처럼 만들어 놓은 큰 틀안에서 오토바이를 4명이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위아래로 오를 내리는 묘기...그외 수많은 묘기들....
중국의 중앙정부는 외교와 군사는 공산주의 노선이지만, 경제는 자유경쟁체제로, 서구세계의 경제활동과 다를게 없어 보였다. 모택동시대의 계획경제를 지양하고, 등소평의 과감한 개혁정책중, 서방 경제정책을 채택한 이후로, 그짧은 시간에 경제적으로 세계무대의 중심에 상하이는
지금 우뚝서서 전세계를 내려다 보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한 상하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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