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29, 2009
지금은 은퇴한 막내와 조카의 교통편제공으로 고향의 이곳 저곳 구경
지나간 세월을 되돌려 보는것은 항상 후회가 앞선다. 그렇게 하지 않았었더라면......그시간들을 되돌릴수 없기에 더욱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고국 방문에서 작고하신 작은 형님의 큰 아들이 우리의 발이 되여 교통편을 제공해 주었기에 정겨웠던, 추억속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고향의 이곳저곳을 편하게 다닐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조카이지만, 나와는 불과 2살 적은, 지금은 공무원에서 은퇴하여 말년을 그의 손자손녀들과 살을 부비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초로의 노인이기도 하다. 조카 부부는 내장산과 백양사의 중간에 있는 전라북도 산림박물관을 구경시켜 주었다. 학생들의 현장체험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이곳에서 잘진열된 옛날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볼수 있었고, 생태계의 상호 관계를 관찰할수 있었다. 우리가, 특히 커가는 어린 학생들이 즐겨먹는 햄버거가 산림을 해치는, 그래서 산림을 죽이는 무덤이라고 설명한 내용을 보고 놀랐다. 전연 생각지도 않은 내용인데, 그렇게 무심코 먹기만 했었는데......또한 그전에는 내장산에서 백양사를 가기위해서는 산속의 오솔길을 하루종일 걸어서 가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잘 뚫린 도로를 이용했기에 불과 몇분만에 백양사에 도착했었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것이 좋긴한데, 반대 급부로 환경오염은 어떻게 되는걸까? 대웅전 뒤로 높게 보이는 황갈색의 바위봉우리는 변함이 없이 그대로 내눈에 들어왔다. 황토현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전적비와 기념관을 관람하면서, 돌아가신 박통께서 전적비 제막식에 참석했던 당시의 순간들을 기억속에서 들춰내 볼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고,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여 많은 구경꾼들을 전국에서 끌어 들이고 있는, 바다를 막아 대한민국의 지도를 바꾸었다는 새만금 간척지에서 그규모의 웅대함과 갑문들을 보았고, 간척지안의 갯뻘이 여러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여, 어떤곳은 농지로, 어떤곳은 공원지역으로, 어떤곳은 공업단지로 그리고 또다른 용도로 이용하게될 현장을 내눈으로 확인하기도 했었다. 변산에서 시작된 새만금 뚝( Levee)은 마치 조그만 산처럼 높아 보였으며, 그위로는 4차선 도로가 건설되여 군산까지 이어진다고 들었다. 고인이 된 정주영 현대건설회장의 얼굴이 이뚝을 보면서 생각난다. 뚝을 막는데 흐르는 물결이 너무세어 추럭에 가득한 흙을 부어도 다 떠내려 가버리자, 폐선으로 있는 큰 화물선을 끌어다 물결을 막고 뚝을 막게한 그의 아이디어와 용기 그리고 뚝심, 그것이 오늘의 한국 토목공사 기술걔발에 한획을 긋게한 그의 창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당시 토목기술자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무모한 짖이라고 동조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의 배짱으로 밀었다고 들었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많이 변했다. 우선 사람들이 변했고, 동네의 모양도 그사이 너무나 변해 있었다. 머리속에서는 어제의 일처럼 여기는 우물이 있었고, 그옆에는 미나리깡이 있었고, 그옆으로 언덕길이 있었고,......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흔적이 없었다. 수도물이 우물을 대신했고, 미나리깡은 메워져 마을 회관이 그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옛날 코흘리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내가 태어난 집 뒷뜰에 있었던 대나무밭은 흔적도 없었다. 코흘리개였던 내가 지금은 환갑을 지나고도 몇년을 더 살아오면서, 그많던 새까만 머리털이 다 빠져 버리고 그나마 몇개 있는 머리털은 하얗게 변해 있는데, 어찌 다른것들은 변치 않기를 바랬다면, 그것은 나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착각일뿐인것이라고 마음속에 다짐했다.
지난번 방문했을때는 동네 노인회장을 맡아 열심히 봉사 하시던 큰매형께서, 얼마전에 고인이 되여 고향 선산에 모셔져 있는 산소에도 들렸다. 봉분의 흙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검은 천으로 덮어 놓은점이 어렸을때 보았던 산소와 다른점이었다. 꿈만 같다. 오랫만에 방문한 처남을 대접하기위해 같이 노래방에 까지 가서 같이 밤새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시는 매형이 됨을 보면서, 다시한번 시간의 흐름을 가슴속에서 느낀다. 막내동생은 전주에서 부터 정읍까지 우리 부부에게 교통편을 제공하느라 직장을 빠지기도 했었다. 조카부부는 교통편은 물론이고, 토종닭을 잡아 삶아 대접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 신세만 지고, 그들을 뒤로하고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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