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또 저물어 간다. 바꾸어 얘기하면, 세상을 하직할 그날이 더 가까워 지고 있다는것이 한편으로는 서글퍼지는 느낌이 든다. 살면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고, 정을 나누고, 친교를 하면서 하루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었던 분들에게 이메일도 보내고, Text message도 보냈고, 전화도 드렸고...... 나름데로 고마움을 표시 해 볼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은 나의 생각일뿐, 상대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혹시나 나의 성의 부족으로 보여 지지나 않았을지? 걱정이 먼저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혹은 어떤 친지는 멀리서 바쁜속에서 가게를 하면서도 잊지 않고 먼저 전화를 해서 인사를 해주신분께는 너무나 미안 하기만 하다. 별로 바쁘게 할일도 없이 지내는 내가 먼저 소식을 전했어야 했는데....
나를 아는, 또 친교를 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앞으로 2시간쯤 남은 2010년도를 역사속으로 떠나보내는 시점에서, 더욱더 건강하시고, 2시간후로 다가오는 신년에는 계획 하시는 모든 일들이 윗분의 보살핌속에서 진행되기만을 빌어드리고 싶다. 우리 부부도 건강에 더 관심을 갖고 하루하루를 뜻있게 살아 가도록 하는 각오를 해 본다. 모든것이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다 뜻데로 되는것만은 아니라는것을 삶의 경험에서 겪어 왔기에, 더 조심스럽고, 간절함이 더 해진다.
신년을 맞이해도, 큰 이변은 없을것 같다. Cataract Surgery를 해서 잘 회복되고 있고, 수술을 집도한 닥터께서도 Outdoor Activity를 하는데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이 하고 싶은데로 하라고 하시면서, 단 조건 하나를 달았었는데, 그것이 바로 눈에 비눗물이나 기타 자극이 심한 이물질이 들어가는것을 조심 하라고 한 말이 머리에 남아 있어, 매년 1월말이나 2월초면 중남미로 해수욕겸 골프여행을 가곤 했었는데, 아예 실수로 눈에 상처를 받을까봐, 그런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고 그냥 긴 겨울을 조용히 보내야 될것같아 변화가 없는 신년을 맞이 할것 같다. 당장에는 좀 불편해도 앞날을 생각해서 이정도의 따분함을 감내해야 할 삶의 일부분인것으로 받아 들이면서 새해를 맞이 할것이며,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
Friday, December 31, 2010
Saturday, December 25, 2010
성탄절에 아프칸에서 수고하는 캐나다 병사들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교회에 가서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준비해준 불고기 점심을 맛있게 먹고, 그리고 다시 커피접으로 옮겨 커피를 마시고, 또 내가 아끼는 후배 부부에게서 저녁을 얻어 먹고 집에 도착했을때는 해가 서산에 넘어가서 어둠이 사방을 가리고 있을때였다.
어제 낯에는 아이들과 모처럼만에 모여 아내, Lunar가 정성들여 오븐에 구워낸 Turkey 고기를 먹으면서 가족의 의미가 뭔가를, 사랑이 뭔가를, 우리 부부가 아끼는 친지들과 마음의 문을 열고 좋은 우정을 나누고 또 우리가족이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맛있는 Gourmet를 먹으면서 마음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입에 넣기전에, Lunar 가 간절한 마음으로 윗분에게 감사의 기도를 했었다. 그러나 어제도 그랬었고, 오늘도 어제처럼 이러한 평화로움속에서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눈치를 볼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성탄절 Holiday 를 즐길수 있게 해주는 그근본 밑바탕에는 말없이 목숨을 담보로 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것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부터 감사한 마음과 함께 느꼈었다. 부모 형제 그리고 친척이 살고 계시는 조국 대한민국의 한반도땅에서 자유를 느리면서 삶을 즐길수있게 해주는 방패막이 역활을 하고 있는 젊은 병사들을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있어 적으로 부터 조국을 지켜 주었기에, 35년전 조국이 만들어준 여권을 두손에 거머쥐고 편안히 비행기를 타고 이민길에 오를때도 감사해 하면서, 이들보다 몇년 앞서 내가 최전방에서 조국방어에 일부를 담당하기를 잘했었다고 나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조국의 품을 떠났었다. 지난 몇개월 동안에 조국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북쪽 망나니들과의 분쟁에서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젊은 후배 병사들에게 선배병사로서 더 고맙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이시간에도 추운 전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한눈 팔지 않고 철책넘어의 적들을 응시 하면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그들의 수고가 있기에 뒤에 두고온 형제 자매들이 자유를 구가 하면서 평화를 누리고 성탄절을 축하하고 있을수 있음에 멀리서라도 감사한 마음을 느끼는데, 조국의 국민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고마워 하고 있는줄 알지만, 일부의 시민들은 북쪽 망나니들의 선전 책동에 현혹되여 전선을 지키고 있는 젊은 병사들의 사기를 꺽는 망국적인 언행을 서슴치 않는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캐나다는 군대의 규모는 조국 대한민국에 비하면 그 규모가 약 1/8 정도가 채 않되는 적은 규모지만, 세계의 평화와 안녕 질서를 위해 세계 각곳의 분쟁 지역에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여 지켜 주고 있기에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를 구가 하면서 삶을 누리고 있음을 나는 가슴으로 부터 깊이 느끼면서 감사해 하고 있다. 오늘은 성탄절, 아기 예수의 탄생을 Celebrating하면서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의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가족들이 한테 모여 푸짐한 음식을 차려놓고 배부르게 하면서 정을 나누고 윗분에게 감사함을 기도로 표시 했었다.
이럴때마다 나는 항상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수 있게 해주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다시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나타내고져, 어렸을때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써 보냈던 기억을 되살려 서투른 위문 편지를 썼다가,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지웠다가 다시 쓰고..... 그렇게 하기를 여러번, 결국 나의 능력으로는 표현 방법이 더이상은 나아질수 없음을 깨닫고, 서툴지만 나의 감사한 마음이 이편지를 읽는 이름 모를 병사들에게, 진실되게 전해 지기만을 바랄수 밖에........그내용을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It's Dec.25th,2010 today that is the birthday of Jesus Christ that our culture and prosperity in N. America and around world, I believe, has been grown and blossomed from him. And we as Canadians have enjoyed and celebrated this holiday with families and neighbors in peace. Today I had lunch with roasted turkey on the table with my two kids who's grown up and living apart from parents that is me and Lunar. Before we start lunch I prayed for our soldiers' safety who's worked hard to defend our freedom and peace from our enemies. One thing sure is that this kind of holidays can't be existed without you, our soldiers' sacrifices that my whole family members have also appreciated from the bottom of hearts. Thank you soldiers. We trust you guys. We will never forget your effort and sacrifices. So long.
Love Paul from Toronto, Canada.
이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 하는한, 먹고 먹히고 하는, 부질없는 세력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 와중에서 자유와 평화를 맘껏 누리면서, 배부른 식탁을 마음만 먹으면 어느때고 대할수 있는 여건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가족들은 분명히 축복 받은 인생이고 삶이라는것을 또다시 느끼게된다. 오늘따라 이감사함을 윗분에게 더 간절하게 그뜻을 알려 드리고 싶다. 동시에 최일선에서 추위와 싸우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병사들에게는 몇자의 위문편지를 써서 감사함을 나타내는게 너무나 얄팍한것만 같아 미안함도 느낀다. 무사히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감사.
어제 낯에는 아이들과 모처럼만에 모여 아내, Lunar가 정성들여 오븐에 구워낸 Turkey 고기를 먹으면서 가족의 의미가 뭔가를, 사랑이 뭔가를, 우리 부부가 아끼는 친지들과 마음의 문을 열고 좋은 우정을 나누고 또 우리가족이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맛있는 Gourmet를 먹으면서 마음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입에 넣기전에, Lunar 가 간절한 마음으로 윗분에게 감사의 기도를 했었다. 그러나 어제도 그랬었고, 오늘도 어제처럼 이러한 평화로움속에서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눈치를 볼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서, 평화롭게 성탄절 Holiday 를 즐길수 있게 해주는 그근본 밑바탕에는 말없이 목숨을 담보로 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것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부터 감사한 마음과 함께 느꼈었다. 부모 형제 그리고 친척이 살고 계시는 조국 대한민국의 한반도땅에서 자유를 느리면서 삶을 즐길수있게 해주는 방패막이 역활을 하고 있는 젊은 병사들을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이 있어 적으로 부터 조국을 지켜 주었기에, 35년전 조국이 만들어준 여권을 두손에 거머쥐고 편안히 비행기를 타고 이민길에 오를때도 감사해 하면서, 이들보다 몇년 앞서 내가 최전방에서 조국방어에 일부를 담당하기를 잘했었다고 나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조국의 품을 떠났었다. 지난 몇개월 동안에 조국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북쪽 망나니들과의 분쟁에서 조국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젊은 후배 병사들에게 선배병사로서 더 고맙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이시간에도 추운 전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한눈 팔지 않고 철책넘어의 적들을 응시 하면서 불침번을 서고 있는 그들의 수고가 있기에 뒤에 두고온 형제 자매들이 자유를 구가 하면서 평화를 누리고 성탄절을 축하하고 있을수 있음에 멀리서라도 감사한 마음을 느끼는데, 조국의 국민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고마워 하고 있는줄 알지만, 일부의 시민들은 북쪽 망나니들의 선전 책동에 현혹되여 전선을 지키고 있는 젊은 병사들의 사기를 꺽는 망국적인 언행을 서슴치 않는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캐나다는 군대의 규모는 조국 대한민국에 비하면 그 규모가 약 1/8 정도가 채 않되는 적은 규모지만, 세계의 평화와 안녕 질서를 위해 세계 각곳의 분쟁 지역에 많은 병사들을 파견하여 지켜 주고 있기에 해당 지역의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를 구가 하면서 삶을 누리고 있음을 나는 가슴으로 부터 깊이 느끼면서 감사해 하고 있다. 오늘은 성탄절, 아기 예수의 탄생을 Celebrating하면서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의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가족들이 한테 모여 푸짐한 음식을 차려놓고 배부르게 하면서 정을 나누고 윗분에게 감사함을 기도로 표시 했었다.
이럴때마다 나는 항상 이러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수 있게 해주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다시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함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에, 그러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나타내고져, 어렸을때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 편지를 써 보냈던 기억을 되살려 서투른 위문 편지를 썼다가, 내용이 마음에 안들어 지웠다가 다시 쓰고..... 그렇게 하기를 여러번, 결국 나의 능력으로는 표현 방법이 더이상은 나아질수 없음을 깨닫고, 서툴지만 나의 감사한 마음이 이편지를 읽는 이름 모를 병사들에게, 진실되게 전해 지기만을 바랄수 밖에........그내용을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It's Dec.25th,2010 today that is the birthday of Jesus Christ that our culture and prosperity in N. America and around world, I believe, has been grown and blossomed from him. And we as Canadians have enjoyed and celebrated this holiday with families and neighbors in peace. Today I had lunch with roasted turkey on the table with my two kids who's grown up and living apart from parents that is me and Lunar. Before we start lunch I prayed for our soldiers' safety who's worked hard to defend our freedom and peace from our enemies. One thing sure is that this kind of holidays can't be existed without you, our soldiers' sacrifices that my whole family members have also appreciated from the bottom of hearts. Thank you soldiers. We trust you guys. We will never forget your effort and sacrifices. So long.
Love Paul from Toronto, Canada.
이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 하는한, 먹고 먹히고 하는, 부질없는 세력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이 와중에서 자유와 평화를 맘껏 누리면서, 배부른 식탁을 마음만 먹으면 어느때고 대할수 있는 여건에서 살고 있는 나와 가족들은 분명히 축복 받은 인생이고 삶이라는것을 또다시 느끼게된다. 오늘따라 이감사함을 윗분에게 더 간절하게 그뜻을 알려 드리고 싶다. 동시에 최일선에서 추위와 싸우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는 병사들에게는 몇자의 위문편지를 써서 감사함을 나타내는게 너무나 얄팍한것만 같아 미안함도 느낀다. 무사히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감사.
Monday, December 20, 2010
뒷전으로 물러난 현실에서 노인분들이 봉사 할수 있는일....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늘 푸른 대학"이 매년 가을철이면 개강하여 운영되고 있다.
말이 늘 푸른대학이지, 실상은 교회에 출석하는 노인분들과 교민사회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8주간의 Term으로 다양한 프로그람으로 편성하여 황혼의삶을 살아가시는 부모님들, 노인들에게 서로 어울려 즐거운 삶의 맛을 재음미 하게 해드리는, 그리고 남아 있는 시간들을 즐겁게 즐기시게 하여드리는게 주 목적인것 같다. 이시간에 참석하여, 같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느낀점은, 나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늘푸른 대학의 학생분들이, 써비스를 받으면서, 당연한 것쯤으로 생각하고 또한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인색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봉사하는 젊은분들은 생업을 접고, 그시간에 부모님 같은 노인분들이 즐기고 있는 노인대학에 나와서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돕고 있음을 고마운 마음으로 소화 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한시적인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남아있는 많은 시간들을 무료하게 보내는 노인으로 돌아가야만 되는 우리 부모님, 노인들에게 좀더 뜻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보람을 느낄수 있게 하는 묘안을 찾아 보고져, 푸른 대학이 개강하고 있는 동안에, 몇명의 뜻있는 분들이 같은 건물안의 조금만 방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자문하고, Research도 하면서 중지를 모았는데, 결론은 시간도 즐겁게 보내고, 또 보람을 느낄수 있는 방법으로 ' 우리 노인들이 할수 있는 능력한계내에서 주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봉사 할수 있는길을 찾아서, 시도해보는쪽이 좋을것 같다'라는 최종 의견으로 모아졌다. 나는 나의 생각을 간략하게 그모임에서 피력했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이 한것같다.
우리 부부는 여름이면, 은퇴후부터, 시골 카테지에서 골프를 주로 하면서, 대부분이 은퇴한 서양 부부들과 가끔씩 교제를 하면서 그들의 노년 생활의 일면을 보아오곤 했다. 우리 부부의 경우는 거의 카테지의 maintenance를 할줄 몰라 있는 그대로 사용만 하는데, 이분들은 여름에는 풀깍고 화단 가꾸고, 겨울이면 집손질하고.....또 친지들과 어울려 Eating out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또 봉사단체 예를 들면 Lions Club같은데 조인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시간을 활애하여 봉사하고, 모금 운동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보았다. 옆집의 한부부는 우리보고 " Paul and Lunar, you guys are city boys that maintaining cottage beautifully doing like gardening is not familiar with". 대부분의 노부부들은 주일날에는 교회나 성당에 가지를 않지만, 그들의 행동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올바른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고 나름데로 평가 해주고 싶다. 그중에서 인상에 남는것중 하나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특히해 그 대강을 서술해 본다.
금요일 점심때쯤 옆집에 살면서 친하게 지내는, 두살위인 Barbara 부부와 같이 Eating out을 하러 가는길에, 자기가 매주 수요일에 하루종일 조그만 교회에서 봉사활동하는데를 들려서 보여줄게 있다고 하면서 핸들을 그곳으로 돌렸다. 카테지촌의 중심가에 있는 조금만 교회건물앞에 도착했는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웅성거리는것이 보였다. 조금만 교회안 본당은 예배보는 교회라기 보다는 조그만 잡화점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열되여 있는 옷과 기타 살림도구들을 찾아서, 카운터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는것이 었다. 카운터에서 일하는분들은 대부분이 여성노인들로 돈받는분, 백에 싸주는분, 질문에 답하는분 등등으로 할일을 구분하여 친절하게 손님들에게 써비스 하면서, Barbara를 보자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우리 부부는 Turkey의 이스탄불에 있는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회에 보내기 위해 영문판 동화책 약 10권을 구입했는데, 가격은 전부 1달러였다. Garbage Bag에 옷을 잔뜩 넣어도 가격이 5달러가 채 안되는것을 알았다. 오늘 일하는 여성노인분들은 아침 10시부터 판매를 해서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고 한다. 호숫가에 있는 아담한 식당에서 점심을 하면서, 아내가 아까본 광경에 대해 물어 보자,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까지는 여러곳의 단체나 개인들로 부터 들어온 Donation 백들을 풀어서 내용물을 구분하여 팔수 있도록 정돈 한다고 한다. Barbara는 주5일중에서 수요일날 하루를 택해 아침부터 Full time으로 백에 들어 있는 옷들과 기타 살림도구들을 Sorting하여 팔수 있게 tag도 부치고 진열대에 진열하고......즉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봉사자 모두가 금요일 하루에 팔수 있도록,Donation된 모든 물건들을 준비하는 봉사활동이라고 한다. 하루에 보통 10 여명이상이 나와서 한다고 하는데, 엄격한 규율을 정해 놓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자기당번날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Emergency로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것 처럼 위급한 상황이외에는 Excuse가 안된다는 것이다. 이규율을 어기면, 그사람은 봉사활동에서 제명된다고 하는데, 본인이 먹을 점심과 스낵 그리고 물을 지참해야 한다고 한다. 봉사이기 때문에 주최측에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혹시 본인이 필요한 물건이 있을시에는 꼭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줄을 섰다가 지불하고 가져 간다고 한다. 봉사자들의 이름과 당번날과 해야 할일등이 적힌 시간표가 자세히 명시되여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날, 즉 금요일에 판매를 하는데, 거의 다 팔린다고 한다. 혹시 남게 되면 다시 백에 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무료로 보내 진다고 한다. 판매된 수익금은 전부 모아서 근처의 종교 단체나 봉사단체에 현금으로 형편에 맞게 다시 Donation 한다고 했다. 작년에는 약 6만 달러를 벌어서, 필요로 하는 인근 단체에 보냈다고 한다. 한푼 두푼이 모여 거금이 된것이다.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노인여성분들은 웃음이 떠나질 않아 보였다. 긍지도 대단해 보였다. Barbara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는데 긍지가 대단해 보였다. 그날이 되면 노인이지만 화장도 하고 준비를 많이 하고, 남편 Gene이 그곳까지 태워다 주곤 하는것이 보기 좋았다.
이 봉사단체는 역사가 아주 깊다고 했다. 그래서 인근 뿐만이 아니고 멀리서도 알고, 많은 단체들이 Donation 하러 찾아오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기위해 찾아 온다고 했다. 여기서 깊이 느낀점은,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쓰레기통에 버리는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필요할것을 알기에 모아 두었다가 Donation을 하던가, 아니면 여름날에는 Garage Sale 또는 Lawn Sale 싸인을 집앞에 걸어놓고, 10쎈트에서 시작하여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유익하고 아름다운 풍습이 이어져 오고 있는것이, 우리가 속해 있는 한인 코뮤니티와는 많이 다르다. 체면따위같은 것은 아예 존재 하지도 않고, 모두가 진지하게 분위기를 즐기는것이 보기에도 참 좋다. 이점에 착안하여 오래전부터 이교회에서 규모를 늘려 봉사활동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는점을 알수 있었다.
우리 한인 장로교회에는 많은 신도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다. 특히나 우리 교회는 은퇴한 노인분들이 많이 계신다는점을 이용하여, Barbara가 봉사하고 있는것 처럼, 옷이나 생활도구들을 포함한 Second Hand 물건들을 Donation받아, 다시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주저렴하게 판매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그시간들을 노인분들이 담당하면, 노인분들에게 유용한 시간이 될것이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연말에 결산하여 주위의 필요로 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기부할수 있게 된다면 ....... 하는 생각을 늘 해오곤 했다. 이런 봉사활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지원자를 모집하고, Donation을 받고 있다는 내용을 주위의지역사회에 알리고 우리 한인사회의 개인이나 단체에도 알려서 수집하고, 제일 중요한것은 자원봉사자분들에 대한 "봉사활동" 기초 훈련을 위한 연구가 필요한것과, 교회와 협의해서 일정공간을 제공 받아야 시행이 가능 할것으로 사료된다. 이사업은 나의 생각으로는 큰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것도 아니고, 여러사람이 모여서 할수 있기에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삶을 즐길수 있는 길이 될수 있을것이고, 봉사의 대가가 어떻게 쓰여 지고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볼수도 있을것 같아 현실적으로 가장 적합한 노인분들의 사업이라고 굳게 생각된다. 한가지 걱정되는것은 우리 한인사회에서 '봉사'라는 명목으로 시작은 많이들 하는데, 용두사미격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한바탕 쇼로 끝나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기에 시작을 해보자고 강하게 대쉬 하기가 망서려지는 아쉬움이 머리속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노인분들의 여유있는 봉사 자세가 우리 한인 커뮤니티에도 생활화 되는날은 생각하기에 따라 쉬울수도 어려울수도 있는 동전의 양면같은 과제로 이 추운 겨울에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Friday, December 17, 2010
Larry King Live 의 마지막 쇼. 남은생애 평안 하시기를....
어제밤 9시에 시작된 생방송 "Larry King Live"는 앞으로는 CNN에서 더 이상 볼수가 없게 된다. 그의 은퇴를 앞둔 마지막 방송이 곧 있게 될것이라는 예고방송이 여러번 있어 온것은 알고, 기억하고 있어왔는데, 그만 깜빡하고, 고국의 드라마를 인터넷으로 보느라, 지나친 것이다. 25년전에 시작된 그의 독특한 프로그람 "Larry King Live"는 그의 재치있는 질문과 답변형식으로, 냉전시대에도,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의 수장들과도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삶의 내용을 파헤쳐, 베일에 싸여 궁금해 했던 주역들의 생활상을 전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자세히, 보도해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직 장막에 쌓여 있던 쏘련의 크레물린궁을 찾아가 당시의 서기장 고르바체프를 인터뷰 하면서, 전세계는 쏘련의 공산정책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할수 있었다.
또 아버지 Bush가 거의 무명이다 시피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의 Bill Clinton,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재선을 앞두고 한판 정치적 싸움을 벌이다, 선거운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여론조사는 Bill이 월등히 앞서 있을 즈음에 CNN의 Larry King Live 쇼에 초대되여, 안간힘을 쓰면서 한표를 부탁하던 아버지 Bush의 기억도 떠 오른다. 어제밤의 마지막 쇼에는 여러 유명인들이 동참하여 축하해 주었지만, 특별히 대통령 Obama의 축하고별 인사와 캘리포니아 주지사 Arnold Schwarzenegger는 "Larry King Day"로 이날을 선포 하기도 했다고한다.
매일저녁 프라임 타임에 진행된 Talk Show의 호스트 Larry King은 어제밤 마지막 고별쑈의 인사에서 "Good bye"라는 용어 대신에 "So Long"으로 하고 싶다라고 멘트하기도 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CNN의 Talk Show에서는 은퇴 하지만, 이후에도 CNN에 틈틈히 특별출연하여 그의 재질을 발휘할 계획이며, 래디오 쇼에도 계속해서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어제밤 쇼의 첫 멘트에서 "Larry King Live"쇼를 시청하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이말을 한다는것이 무척 힘드는 순간입니다" 라고 소회를 술회 하기도 했다고 한다.
Talk show진행자로 한프로그람에서 가장 오래 Running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 되기도 했다.
어제밤 그는 쇼를 진행 하면서 여러번 눈물을 글썽 하기도 했는데, 특히 Maher씨가 그를 가리켜, Johnny Carson, Steve Allen 그리고 Walter Cronkite등과 같은 반열에 서 있는 TV방송의 전설로 언급할때 글썽거렸던 그의 눈시울이 특별히 기억 될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친구이자 가수인 Tony Bennet이 출연하여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 주어 분위기를 한층 돋구기도 했다. 아직 어린 그의 자손들이 출연하여 같이 축하하고 아쉬워 하는것도 처음 봤다.
"Larry King의 장례식이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안방을 찾을 것이다. 이것은 다만 그이 토크쇼의 마감을 의미할뿐, 한남자인 그의 마감을 뜻하는것이 아니다" 라고 Maher는 강조했었다.
그의 전체 방송경력은 53년 이라고 하며, 그동안에 약 50,000 번 이상의 인터뷰와, 특히 CNN에서 25년 Talk Show를 진행하는 사이 6120번의 세계 저명한 인사들과 Talk Show를 진행 했었다고 한다.
10번의 Cable ACE Awards, a Emmy, Peaboy,그리고 기네스 북에 기록 보유자로 등재 되기도 했다.
나는 그의 Talk Show를 많이 본 사람중의 하나임을 말할수 있다. 어떤때는 해학적으로 얘기를 진행하는것을 보면서, 뜻하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수 없을 때가 있곤 했었다. 계속해서 시청하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의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느끼면서, 더 가깝게 그이 쇼를 보게 됐었다. 앞으로 남은 그의 생애에 건강과 그만의 시간을 즐기면서 생활하시기를 바라고, 두꺼운 안경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에서 생명체, 특히 인간의 영욕이 한순간임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2일전에 눈수술을 마져 마친 내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새로운 삶을 얻은것 처럼 의욕이 마음속에서 느껴지는데, Talk Show의 제왕인 그가 여간 해서는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였던 그순간의 심정을 마음속에서 느낄것 같았다. 어제밤을 끝으로 친숙하게 귀에 익었던 "Larry King Live" 쑈는 역사속으로 스며들고, 그의 재능을 누군가가 다시 펼치게 되겠지....하는 바램이 있다.
http://www.cnn.com/2010/SHOWBIZ/celebrity.news.gossip/12/16/larry.king.finale/index.html?hpt=C1
Sunday, December 12, 2010
쇼가 아닌, 진실된 삶을 살게 될때가 해탈의 뜻 아닐까?
"명성 때문에 내 수행이 쇼가 됐다"
나의 가슴속 깊이 박히는 짧은 이 한마디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다 함축하고 있는것 같아
이 아침에 기분이 쏴아 해진다.
마음속에 생각은 그 끝이 없지만, 행동으로 옮기는것은, 어쩌면 영원히, 얻는것과 잃는것을 구별해 내기가 동전의 양면같은 마음고생이 함께 있음을 살아온 경험에서, 항상 지니고 여기까지 왔음을 실토 할수밖에 없다.
그분의 용감한 삶과, 실천을 위한 계산되지 않는 행동이, 나에게는 없음을 자책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또 없는 능력을 발휘해 보겠다고 발버충치는 어리석음은 더 불쌍한 존재로 전락 시키고 마는 "삶의 우"를 많이도 보면서, 주어진 삶안에서 그날까지 분명하게 생을 이어가는 그자세가 더 값지다고 느끼게 해준 이 기사를 읽은 이아침이 기분좋다. 필요할때, 다시 읽어 보고져 여기에 그내용을 옮겨 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2/10/2010121001258.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2_06
나의 가슴속 깊이 박히는 짧은 이 한마디가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다 함축하고 있는것 같아
이 아침에 기분이 쏴아 해진다.
마음속에 생각은 그 끝이 없지만, 행동으로 옮기는것은, 어쩌면 영원히, 얻는것과 잃는것을 구별해 내기가 동전의 양면같은 마음고생이 함께 있음을 살아온 경험에서, 항상 지니고 여기까지 왔음을 실토 할수밖에 없다.
그분의 용감한 삶과, 실천을 위한 계산되지 않는 행동이, 나에게는 없음을 자책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또 없는 능력을 발휘해 보겠다고 발버충치는 어리석음은 더 불쌍한 존재로 전락 시키고 마는 "삶의 우"를 많이도 보면서, 주어진 삶안에서 그날까지 분명하게 생을 이어가는 그자세가 더 값지다고 느끼게 해준 이 기사를 읽은 이아침이 기분좋다. 필요할때, 다시 읽어 보고져 여기에 그내용을 옮겨 본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2/10/2010121001258.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2_06
Saturday, December 11, 2010
온타리오 호숫가 얼음위에 앉아 있는 새떼들이 추워 보인다.
숫자를 셀수도없이 많은 새떼들이 아직은 얕게 얼어붙은 온타리오 호숫가의 얼음위에 모여 앉아있는 모습이 몹시도 차겁게 느껴져 온다. 그들도 나처럼 캐나다의 긴겨울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고, 춥지않게 보내야 될까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것 처럼 보여졌다. 가끔씩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몇마리의 새들은, 마치 토론을 벌이다 의견일치를 보지못한 홧김에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 나가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수 있는 그런 장면을 연상하기에 충분한 그림을 그리게 해준다.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로 날아와 앉는것이 눈에 뚜렷히 들어온다.
매년 이맘때면 이러한 새떼들의 군무는 흔히 보아온 광경이다. 사방 천지가 파랗게 물들어 있는 시절에는 물위에 몰려서 떠 있는 새떼들을 보면서 여유를 느끼곤 했었는데, 오늘 처럼 얼음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항상 마음을 차겁고 공허하게 해주는 느낌이 깊다. 그위에 더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유는 며칠후면 또 한해를 맞이 하게 된다는, 달갑지 않는 세월의 손님이 나를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맬려고 달려 오고 있다는 느낌이다. 언제 부터인가 그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 붙잡히지 않을려고 이맘때부터 발버둥을 쳐 보지만, 도리가 없이 꼭 잡히고 만다. 잡히는 순간부터 혹독한 고문을 피할수 없었기에, 그후유증이 너무나 많이 온몸에 나타나는것을 마음 아프게 견디어 낼 뿐이다. 머리가 빠지고, 몇개 안남은 머리털은 하얗게 변해 버리고, 멀리 까지 밝게 볼수 있었던, 그래서 옮고 그른것을 분명히 구별할수 있었던 시야는 어느새 흐려지고, 그렇게도 사태를 빠르고 명석하게 분별해주던 머리는 붙잡히는 순간 가장 심한 고문을 당해서 인지, 판단히 흐려지고 기억을 되살리는 힘도 약해져 버리게 만들었다. 목을 통해 넘기는 음식물의 양도 매년 줄어드는것을 느낀다. 세상에 이러한 고문(?)을 감내해내야 하는 캐나다의 긴겨울이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오늘 얼음위에 몰려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새떼들을 보면서, 준비를 해 보겠다고 다짐은 해 보나, 어찌 순리를 거스릴수가 있겠는가? 겸허히 받아 들이고, 때리면 그아픔을 감내 하면서, 그속에서 살아남는 지혜를 또 다른 각도에서 터득해야 한다. 한파를 동반한 추위와 더불어 한살을 억지로 먹이는 고문을 견디기 어려우면 잠시 따뜻한 남쪽으로 피해 보지만, 그래도 견디기 어려우면 또다른 방법을, 매년 해 왔던것 처럼, 이번에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피해볼려고 하는것 만큼, 고문의 흔적이 덜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 하지만, 머리털과 두뇌회전과 시력과 약해지는 신체의 반응은 노력하는것과는 무관하게 꼭 그만큼 매년 더해지는것 같다. 중국천하를 주름잡고 호령하면서 삶을 즐겼던 진시황제의 마음을 이겨울에는 조금이라도 읽을수 있을것 같은 심정이다.
웅크리고 모여 앉아있는 저 새떼들도 혹한을 동반한 새로운 한해가 엄습해 오는 속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지못한 놈은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릴것이고, 무난히 넘긴놈들도 비틀거리면서 더 좋은 세상과 세월이 기다리고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머리속에서 그리면서 견뎌 내겠지? 새떼들아 우리 모두 같이 건강히 코앞에 닥쳐 있는 혹한과 손잡고 달려오고 있는 세월이라는 고문의 한해를 지혜롭게 맞이하고, 그후 파란색갈로 색칠되는 그때를 맞을 희망을 갖고 헤쳐 나가자. 긴겨울을 지난후에 몸둥이 이곳저곳에 남겨지는 고문의 흔적은 또 어떤모습으로 보여질까? 윤회라는 말도 떠 올려진다.
Tuesday, December 07, 2010
고국을 빛내고, 미국의 체면을 완전히 구기게 한 그사람(?), 결국 쇠붙이 조각으로
미국의 체면을 완전히 구기게 한 그사람, 고국의 자존심을 지켜준 그는 누구일까?
오래전 고국을 방문했을때, 옛직장 선배로 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기억이 새삼 지금 떠 오른다. 선진화를 부르짖고 앞만 보면서 달리다가, 옛날을 기억하게 하고, 생각나게 하는 기록들을 전연 챙기지 못하고, 다 없애버린 우를 범한 예를 설명해 주면서, 고국의 철도 박물관에 비치되여 있는 증기 기관차가 그런 예라고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철도가 선진화 되여 디젤 기관차 전기기관차 그리고 전철화 되면서, 고국에 철도가 건설되면서 부터 철마 역활을 했던 증기기관차를 한대도 남기지 않고 전부 고철로 매각해 버렸다는 것이다.
선진화를 이루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옛생각이 떠 올라, 기차라고 하면 증기기관차로 연상되는 많은 시민들의 호응에 부응하기위해 증기기관차를 전시하려고 찾았으나, 그렇게도 흔하게 보였던 증기기관차는 고사하고, 제작도면하나 남아있지 않고 완전히 없애 버린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것이다. 백방으로 현장의 공작창을 이잡듯 뒤졌으나, 결국 흔적하나 발견 못하고, 어이없게도 중국에 철도엔지니어를 파견하여, 겨우 증기기관차 제작 도면을 한벌 구해와서, 그도면을 보고 새로 제작하여 철도 박물관에 전시된 기관차가 그렇게 해서 탄생 됐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고국의 조선일보 신문을 보면서, 깜짝 놀랄 기사를 읽었다. 1969년도에 최초 제작됐었고, 다음해인 1970년도 부터 상업용으로 팔리기 시작했던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비행기 747기가 고국의 한 선견지명이 있는 시민이 미국에서 구입하여, 서울에서 가까이 있는 남양주군의 한곳에 전시하여 관람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잉사에 의하면 점보기 747기는 약 1,000여대를 생산했는데, 첫번째로 제작된 비행기는 시험용이었고, 2호기 부터 상업용으로 투입되기 시작했는데, 상업용으로서는 첫번째 비행기가, 지금은 파산되여 없어진 PAN AM사에 의해 운영됐었단다. 퇴역되여 전시되여 있는 고물 비행기를 백만 달러에 구입하여, 고국 대한민국으로 운송하기위해 22대의 콘테이너에, 해체하여 선적한후, 지금 전시되여 있는 이곳에 오게 됐었다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 나라 미국이 상징성이 짙은 이비행기를 지키지 못하고, 동방의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의 조그만 지방에서 전시 돼도록 까지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소식이 전세계에 알려지자, 부랴부랴, 미국의 자존심 문제라면서, 재구입을 서두르기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국측이 요구하고, 재구매를 요구한다면, 들어주는게 옮다고 여겨진다. 다만 그냥 돈 받고 주는것은 지양해야 한다. 국가채면과, 이와 연관된 모든 정황을 뚜렷히 명시하는 조건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미국의 어느 조직이나 개인에게 재판매 하는것 보다는 미국정부의 이름으로 재구매 해가는 조건이면 더 의미가 깊을것 같다. 조국이 그동안에 이만큼 잘살고 있고, '온고지신'이라는 말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는것 같아 흥미롭다. 6/25 이후 미국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알게 모르게 국보급 보물이나 역사적의미가 있는 유물들이 많이 미국속으로 흘러 들어간게 많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되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국가적 보물이나 유물을 되찾기 위해 이건과 연계 시키면 꼬인 실타래가 풀릴 기회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증기 기관차를 생각없이, 낡은시대의 유물쯤으로 여기고 고철로 매각해 버린 우를 범한 철도 관계자들과,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실에 관여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교훈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762873&ctg=1213
http://articles.latimes.com/2010/dec/06/world/la-fg-korea-plane-20101207
상업용 점보기 1호기를 보관하고 있는 그분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후속으로 LA Times에 Trippe에 대한 기사가 떴다. 내용이 허망하게 나의 작은 염원을 완전히 박살내는,기막힌 기사 내용이었다.
전시된 747기의 주인이, 국수집운영에 상용 할려고 했던 계획이 잘 맞아들지 않자, crane을 동원하여, 전시된 747기를 Wrecking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때는 일본의 어느 교회구룹에서 구입하여 일본에 전시하려고 협상했었으나, 협상이 실패로 끝나, 여기서 좌절을 느낀 주인이 동체를 뜯어내여 쇠붙이 조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인은 나름데로 그길이 최선이었다고 하겠으나, 옆에서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안타깝게 하는것은 그반대인것 같다. Pan Am에서 근무시 이비행기를 탑승했었던 한스츄어디스는, 아래와 같이 서글픔을 토해 냈음을 그녀가 보낸 이멜에서 밝히고 있다.
"I recognized the photo of the Juan Trippe like gazing upon the face of a dear old friend," she wrote. "If her walls could talk, her listeners would not believe the incredible stories she would tell from the golden age of travel which has long since passed into the history books."
즉 이 비행기의 동체가 그곳에 전시되여 있는것을 알아차린 순간 오래된 친구를 바라보는것 같았었다. 만약에 동체가 대화를 할수 있다고 가정 한다면, 오랜시간동안 하늘을 달리면서 일어났었던 믿기지 않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여러 사연들을 얘기 하면 그내용들을 쉽게 믿을려고 하지 않을 것 이상으로 뜻이 깊다" 라고.
결국 미국은, 국가의 체면을 지켜줄만한 뜻깊은 이비행기의 보존에 대해서 관심밖인가 보다.
나의 생각이 너무나 감상적이었었던 것 같다. 역사적 의미가 영원히 사람들의 시야로 부터 사라진다는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http://www.latimes.com/news/nationworld/world/la-fg-korea-plane-demolition-20101213,0,7513661.story
Bruce Trail은 만인에게 열려 있는 전세계인의 산책로인데....
한마디로 우물안 개구리들의 철없고, 생각없는, Bruce Trail을 걸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헛소리인것을, 매주 토요일 Bruce Trail을 걷는 한구룹의 몇몇 회원들이 만들어서 회원들이 보는 블로그에 올린 회칙안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같이 걷는 회원들만 꼭 본다는 보장이 없는 웹싸이트에 올려진 이회칙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이런 회칙도, 그것도 산을 걷는다는 사람들이 만든 약관이라는것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소로움을 금치 못할까? 혀를 끌끌 찰가? 소속된 산행구룹의 회원이라는게 부끄럽기 그지없다.
Bruce Trail의 Head Office에서 운용하는 일년 예산은 약 일백오십만 달러가 훨씬 상회하는 거금을 집행하면서, 약 900 킬로의 Main Trail과 약 400킬로미터에 달하는 Side Trail을 Maintaining 하고 있다.
그들의 모토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연속에서 Trail을 걸으면서 자연을 즐기면서, 신체를 단련하되, 셔터는 마음껏 누르되, 다음 사람을 위해서 자연을 훼손하지 말고, 오직 발자국만 남겨 놓고 가길 바란다" 라고 요약하고 있다. Membership은 누구에게나 Open 되여있으며, 년회비를 내야할 의무는 없지만, 회비를 자발적으로 납부하면 회원이 됨과 동시에 Trail의 유지보수를 위해 협조하는것을 숙지하고, 이러한 모든 것에 만족할 자유가 있다 라고 명시 하고 있다. 그외의 규제 조항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명시된게 없다. 그래서 Bruce Trail은 캐나다인뿐만이 아니고 전세계인을 향해서 문을 열어놓고, Trail을 걸으면서 자연을 즐기기를 권하고 있다.
지난 몇주동안 같이 산행을 했던 나보다 연장자이신분이 오늘 아침 일찍 메일을 보내 왔는데, 그속에서 지금까지 같이 Trail을 걸어왔던 몇명의 회원들이 지난주 산행후 모여서 위에 언급한, 회칙개정을 만들어 발표한 내용을 그들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보고, 너무나 실망이 커서, 앞으로 산행을 접겠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평상시 산행을 할때마다, 요즘 일본을 방문중인 선배 한분이 이들의 무례한 행동과 회칙운영에 걱정을 많이 할때마다, 나는 속으로 '나이 드신분이 그냥 산행을 하면 그만이지, 왜 젊은회원들과 회칙에 대해서 그렇게도 집착 하면서 걱정을 하실까?'라고 마음에 두지 않곤 했었는데..... 이제는 이해를 할것 같다. 그분이 일본을 방문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이 산행을 했었더라면, 이렇게 몇명의 회원들만이 모여서 사리에 맞지 않는 회칙개정을 못하게 했던가, 했다해도 이렇게 황당한 내용의 회칙으로 바꾸진 못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쿠테타를 저지른 꼴을 보여준것이다. 앞으로는 65세 이하의 사람들에 한해서 회원가입을 Open 하겠다니....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을 위해 Outdoor 활동이 더 필요한 것인데.... 그길을 막아버려? 개정된 회칙에 이의가 있는 회원은 댓글에 의견을 피력할수 있을수 있다고 Announcement했는데....실제로 댓글을 달려고 시도해 보았는데, Blocking시켜서 할수가 없었다. Blocking당한 회원은 나뿐만이 아니고 여러명이었던것을 알고 있다.
오늘 메일을 보내온 선배분은 약 한달반전부터 Join하여 같이 산행을 해 왔었는데....
전통에 따라 신입회원으로서의 신고식으로 젊은 회원들 앞에서 노래까지 불렀고...재미를 부치면서 즐겁게 전구간을 다른 회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걷고 또 친교를 해 왔었다. 남의 앞에 서서 노래를 한다는것 자체 부터가 익숙치 못한 인생선배들을 신고식이라는 이름으로 광대놀음을 시킬때는 언제고, 이렇게 폐쇄된 생각으로 꽉 찬, 자연을 즐기고 신체건강의 증진을 위한 취지로,당시의 이곳 캐네디언 사회의 저명인사 4인이 의기 투합하여 창설한 Bruce Trail이 1960년 창설된 이래 셀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아온 Bruce Trail 본래의 정신을 뒤로한채, 몇사람이 좌지우지 하는 산행구룹으로 운영하려 하는가? 지금까지는 Bruce Trail Membership을 구입하는 조건하에서 구룹의 회원가입이 허용됐었으나, 개정된 회칙에서는 아예 그조항을 삭제 해 버렸다. Bruce Trail은 9개의 Local Bruce Trail로 나뉘어져 관리되고 운영되고 있기에 Bruce Trail을 걷는 회원들은 9개의 Local Trail중 하나를 택해서 Local Trail의 회원이 돼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원래의 회칙도 그랬지만, 이번 개정된 회칙에서도 9개의 Local Trail중 어떤곳에도 소속되여 있다는 조항은 없었다. 기본 의무는 무시한채 무임승차를 하겠다는 그취지도 이해 할수가 없다. 끼리끼리 해 먹을려고 한다는, 폐쇄된 사회에서 끼리끼리 생활하는게 싫어서, 그리운 고국을 등지고 이곳까지 이민왔으면, 이곳의 정서에 맞는 사회생활이나 Social Activity를 해야 하는데.....왜 이렇게도 좁아터진, 폐쇄된 생각들로 꽉 차 있을까? 한발만 뒤로 물러서서 쳐다보고 생각해 본다면, 웃음으로 항상 가득한 산행을 매주 즐길수 있을텐데....
괜히 그선배분에게 미안하다. 제발 마음의 상처를 안받으셨으면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나자신도, 여름내내 Cottage생활을 하다, 지난 10월부터 다시 join해서 걷기 시작했더니, 그사이에 Blog에서 댓글쓰는 권한을 삭제 해 버린것을 늦게야 알았었다. 3개월 이상을 연이어 산행에 참석안하면 자동적으로 그권한이 없어진다는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는데, 회칙 어디에도 그런 조항은 없었다. 나는 분명히 여름동안에는 참석못한다는 메세지를 Clear하게 전하고 빠졌었는데.....그리고 회비도 납부했었다. 시류에 따라 편리한데로 몇명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회칙은 이미 소속된 회원들로 부터 의무를 요구받기에는 근본 정신이 없어져 버렸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산행구룹의 건전한 장래 운영과 친목을 위해 여러 선배님들이 타당성 있는것으로 보이는 의견 개시에도 그들은 전연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것을 여러번 보아 왔었다. 회칙개정으로 그러한 의견 개진마져도 완전히 막어 버린 몇명회원들의 행동에 망연 자실할 뿐이다. 진정한 Trail Walker나 산악인의 정신은 회칙개정에 목메는 행동이 아니고, 가슴을 넓게 펴고, 품을줄 아는 마음으로 꽉 차있는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착찹.
Friday, December 03, 2010
백내장수술(Cataract surgery)....남의 일로만 알았었는데...
이동용 수술 침대위에 반드시 간호원의 지시데로 드러눕고, 최종적으로 다시한번 신상을 확인하고, 나는 복창하고 간호원은 떠났다. 조금후에 젊은 남자의사가 와서, 인사를 한다. 자기는 오늘 눈수술을 할 닥터를 도와서 같이 일하게될 보조 의사라고 소개하면서 미소를 짖는다. 잠시후에 낯익은 의사가 나타나서, 한국말로 "안녕 하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잘될것입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이곳 수술실까지 오기전에 수술대기실에서 윗옷을 벗고 가운으로 갈아입고, 오른쪽 손등위에 주사를 맞고, 콤퓨터에 Personal information을 적어 넣었었다.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지루하던터에 마침내 지금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오늘 백내장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는 한국계 1.5세로 이분야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유능한 젊은 안과의사라고 들어 알고 있는터다.
의사는 두눈에 Eye drop을 한방울씩 떨어 뜨린다음 흰 수건같은 천으로 완전히 눈을 포함한 얼굴 전체를 덮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기억을 할수가 없었다. 다시 깨어났을때는 의사들은 보이지 않고, 간호원 한명과 Volunteer로 도와주고 있는 캐네디언 할머니가 옆에서 지키고 서 있는것을 알수 있었다. 수술이 끝났다고 말해 주면서, 회복실로 나를 옮긴다. 약간의 Dizzy함을 느꼈지만, Pain은 느낄수 없었다. 간호원이 "Apple juice or Cranberry juice?"라고 하기에 "Cranberry juice"라고 응답했더니, 옆에 있는 냉장고에서 하나를 꺼내서 Straw와 함께 건네준다. 맛있다. 금방 다 마셨다. 얼른 생각해 봐도 지난 저녁부터 18시간 정도를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었다. 수술한 눈위에 뭔가 안대 같은것을 부쳐줄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없다. 나보다 앞서 수술한 분들을 대기실서 만났을때, 약 절반 정도 이상이 눈에 투명색의 플라스틱 안대를 부착하고 나왔던것을 보았었기에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었다.
간호원이 나의 상태를 살피더니, 이제 회복된것 같으니 Locker로 가서 옷을 입고, 집으로 가라고 한다. 옆에있던 도우미 할머니가 나를 부축(?)하고 Locker room에 안내해줘 옷을 갚아 입고, 다시 Lunar가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로 안내해 주었다. 무사히 걸어나오는 나를 보고 Lunar의 표정이 밝아 보이는것 같다. 정작 본인보다, 옆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더 초조함을 느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지난 3월에 Turkey여행을 다녀와서 부터 운전을 할때마다 오른쪽 눈이 좀 불편한것을 느꼈었다. 검안의를 찾아가 검사를 했는데, 백내장이라는 판정을 해주면서, 왼쪽눈도 시작되고 있다고 일러준다. 백내장 수술전문의를 연결시켜주어 약 8개월만에 수술을 받게된것이다. 평상시 눈의 시력이 건강했기에 친지들로 부터 백내장에대한 경험담을 들을때는 나와는 무관한, 평소 시력이 약한분들에나 나타나는 증상쯤으로 가벼히 여기고 왔었는데, 검안의 설명은 허탈감을 갖게 까지 했었다. 누구나 Senior가 되면 노화현상의 한과정으로 눈의 동공에 힌백태가 끼는 현상이어서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아무런 부담없이 간단하게 수술을 하여 동공을 제거 한후 새것으로 바꾸어 낀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유능한 한국계 젊은 의사가 연결되여 그곳에서 수술을 받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나도 별수 없이 Senior대열에 들어가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었다. 아직 어렸을때 시골 동네에서 살고 있을때, 할아버지께서 눈이 안보여서 힘들어 하시는것을 보았던 기억이 떠 오르고, 같은 또래의 동네 어르신들께서도 그러한 증상으로 고생 하시는것이 아스라히 기억에 떠 오른다. 친구의 할머니는 결국 앞못보는 맹인이 되다시피 하시면서 어렵게 살으셨던 기억이 새삼스러운데.....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Senior들은 아무런 걱정없이 수술을 받아 남은 생애 동안 다시 밝은 세상을 즐길수 있다는 축복에, 감사할 따름이다.
친지들로 부터 백내장 수술을 받은후의 경험을 많이 듣고 있었기에, 덤덤한 기분으로 수술에 임했었다.
백내장 수술은 집도하는 의사에 따라 Processing이 약간씩 다른것을 오늘 경험으로 알수 있었다. 수술하기 3일전부터 처방받은 안약을 하루에 4번씩 투약했었다. 실제로 수술은 불과 몇분인데, 여기까지 오기위해서는 그렇게도 긴시간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그시간이 무척 지루 했었지만,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음을 경험하면서, 친지들이 쉽게 경험담을 얘기해준것이, 결코 쉽게 지내온것만은 아니었음도 오늘 깨달았다.
Lunar가 운전을 하고 집으로 왔어야 했으나, 그것이 편치가 않아 내가 핸들을 잡았다. 병원에 들어올때까지내리던 가랑비가, 병원을 나왔을때는 함박눈으로 변해 하염없이 내려, 미쳐 녹지 못하고 쌓여 있었기에, 그녀에게 고속도로를 달리라고 하기에는 마음이 편지 못했기 때문이다. Lunar는, 닥터가 신신당부 했던말을 상기하면서, 자기가 하겠단다. 닥터는 절대로 오늘 하루만은 운전대를 잡지 말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닥터가 괜한말을 한게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져 깜박 하기를 여러번 했었다. 그때마다 Lunar가 경고하고 신호를 주어, 어쨋던 무사히 집에 도착했었다는데 감사하지않을수 없었다. 발달된 의술의 혜택을 입어 다시 환한 세상을 볼수 있음에 감사 하지 않을수 없었다.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에, 부모님 세대에 태어나지 않고 늦게 세상에 태어나서, 더 밝은 세상에서 남은 생애를 즐길수 있게 됐다는데 감사하지 않을수 없었다. 더 감사한것은 Lunar가 옆에서 꼭 지켜주면서, 안심을 시켜주고, 내가 행여나 배고픔에 영향을 받을까봐, 그녀도 나와 똑같이 먹을 것을 안먹고 나와 행동을 해주면서까지 챙겨준 수고와 분신임에 감사하고..... 마지막으로 윗분에게 감사 했다.
닥터의 지시데로 다음날 아침 일찍 그의 Clinic으로 수술경과를 점검받기위해 다시 부산을 떨었다. Lunar가 간식과 물한병을 챙겨줬다. 오늘은 나혼자 가기 때문이었다. Clinic대기실에는 벌써 환자들로 분주했다. 등록후 내차례가 되여 닥터를 만나서, 어제 수술 고마웠다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웃으면서 어제 수고 많으셨다고 답례를 하면서, 준비된 장비에 나를 조준 시켜놓고, 검사를 했다. "자 눈동자를 위로 치켜 뜨세요. 왼쪽으로 돌리세요. 아래로 초점을 맞추세요.....등등" 점검후 그가 더 좋아 하는것 같다. 수술이 아주 잘 되였다고 설명해 준다. 더이상 Clinic을 방문할 필요가 없단다. 사용해온 Eye drop을 계속 사용하라고 일러준다. "특별한 일이 없는한 다른쪽 눈을 수술할때 병원에서 뵙지요.두가지만 조심해 주세요. 첫째는 심하게 충격을 주지 마시고, 둘째는 세수할때나 샤워할때 비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만 하십시요" 비눗물은 평상시에도 눈에 들어가면 쓰리고 아픈데, 그까짖것 지키는것은 문제가 될것같지가 않았다. 진찰을 끝냈다. 가깝지도않은 Clinic을 또 오게 되지 않을까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안심이 되면서, 잘알고 지내는 지인한분은 수술후 여러번 닥터 사무실을 방문하는 번거로움을 겪었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 나기도 했다.
이제 정확히 2주후에 다시 왼쪽눈마져 수술을 하게 된다. 닥터가 그렇게 하도록 조언을 해 주었기에 받아 들여 하게 되는것이다. 만약에 수술비를 내 주머니에서 지불해야 했었다면 닥터가 돈을 더 벌려고 부추끼는것이려니 하고 한번 생각을 해 볼만도 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모든 의술비용은 정부가 부담해 주기에, 그분의 조언에 감사할 따름이다. Senior들로 가득찬 대기실에서 몇시간 지루함을 참아내면, 밝은 세상을 다시 즐길수 있는데, 그까짖 몇시간을 못기다리겠는가? 행복에 젖은 투정임을 느끼면서, 간사한 인간의 한 단면을 나자신에게서 느끼면서 욕심의 끝은 어디일까?라고 나에게 자문자답을 해 본다. 나의 남은 생애동안, 이번 기회를 통해서 겉과 속이 항상 같은 사람으로 살아갈수 있게 되기를..... 감사.
Dec.15,2010.
다른쪽, 즉 왼쪽눈을 마쳐 백내장수술하기위해,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었다. Lunar가 옆에서 더 걱정을 하는것 같다. 수술이 끝난후, Lunar가 Hwy 401을 운전하고 집으로 와야 한다는것에 마음이 좀 무거웠었는데
마침 같은 콘도 Compound에 거주하고 있는 친지부부가 우리와 같이 병원까지 동행해서 시간을 보내겠단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약 85킬로쯤 떨어져있다. Lunar가 운전을 잘 하지만, 웬지 내마음이 편치 않음을 그친지 부부가 알고서 였을까? 고마웠다. 병원으로 향할때는 내가 운전하고 갔었다. 약 한시간 반을 수술대기실에서 기다렸었다. 지난번 처럼 오늘도 수술대기실에는 많은 환자들, 거의 모두가 Senior들이였다.
내이름이 호출되여 다른방으로 옮겨졌다. 먼저 탈의실에서 윗옷을 벗고, 병원용 가운으로 갈아 입고, 다시 수술직전의 대기실로 옮겨져, 간호원으로 부터, 지난번과 똑 같이, 인적사항, 건강상태, 아침식사여부 등등....그리고 혈관주사를 오른손등에 있는 힘줄을 찾아 꽂아두고 다시 혈압을 점검했다. 간호원들이 도와주는것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나의 천성으로 봐서 그런 직업을 해내낼수가 없을것 같이 느껴져서, 더 고맙게 생각이 든다. 작업장에 들어서면서 부터 맞닥뜨리는 상대들 모두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닌,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을 정상으로 되돌리려 노력하는 것이 전부다. 수술을 하기위한 마지막 점검에서, OK 판정을 내리더니, 이제 수술실로 옮겨질것이라고 한다. 다른 간호원이 나를 수술용 침대로 대리고 가서 차분히 눕힌다. 그리고 다시 확인을 한다. 출생년월일, 주소, 이름, 오늘 수술하게되는 쪽의 눈을 되묻는다. 확인절차가 끝나자 마자 침대가 수술실로 옮겨져, 닥터가 들어왔다. 얼굴이 낯익다. 지난번에 첫번째 눈에 수술을 해준 그닥터다. 그가 먼저 반갑게 한국말로 인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게되니 수술을 앞둔 상황에서 친근감이 더해진다. 이민와서 부터 사귀었던 서양친구보다 눈수술로 오늘이 두번째 만나는 이 한국계 젊은 의사의 몇마디가 더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지난번 했던데로 간호원이 먼저 수술할쪽의 눈두덩이와 그부근을 알콜로 소독하고, 의사가 눈에 Eye Drop 한방울을 떨어 뜨리고, 힌천으로 온 얼굴을 가린후 기계를 조작하여 수술을 했지만, 나는 그순간에 꿈속을 헤맸었던것 같다. 불과 10분도 안돼여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져, 다시 혈압을 재고나더니, Cranberry juice 한컵을 건네준다. 허기진 배에 집어 넣으니 기분이 달라지는것 같다. 허긴 지난번 7시부터 물한모금 넘기지 않았으니..... 생각해 보면, 단 7분여간의 수술을 위해서 만 하루를 힘겹게 준비 했어야 했었던 것이다. 오늘은 웬지 지난번보다 마취기운이 가벼운것 같다. 아마도 친지부부가 같이 응원차 같이 동반해서 가벼운 마음이라서 그럴까?
이튼날, 다시 Clinic으로 수술경과를 보기위해 다시 자동차를 몰았다. 지금은 혼자이다. Lunar는 그동안 어수선 했던 집안 청소를 해야겠기에 집에 남아있고.....
Clinic 대기실에는 어제 수술시에 만났던 다른 환자들이, 나처럼 수술경과를 점검하기위해 먼저와서 대기하는분들도 있었고, 내뒤를 이어 들어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모두가 서양 노인들이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일분간의 시간은 하루를 지내는 정도로 지루하기만 하다. 마침대 내이름이 호출되여 어제 수술집도한 닥터를 그의 방에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먼저 한다. 기계를 통하여 점검한후, 그의 의견은 수술이 아주 잘되여 기쁘다고 한다. 나도 마음도 놓였다. 수술전부터 사용하던 Eye Drop들은 빈병으로 남을때까지 다 사용 하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약 한달후쯤해서 나를 Eye Surgeon인 닥터에게 소개해줬던, 검안의에게 찾아가서 점검을 한번 받아 보기를 권하고, 다시 다른 환자를 보기위해 바삐 방을 나간다. 고맙다. 앞으로 환하게 사물을 보면서 삶을 즐길때마다 Dr. Ro 를 생각하게 될것 같다. 의학적 용어면에서, 나는 내몸속에 Artificial object를 달고 다니는 환자(?)인 셈이다. 어제 수술전에 점검을 하던 간호원이 내 몸속에 다른 보조기구가 들어 있느냐고 물었을때,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아니야 네 대답이 틀렸어. 네의 눈속에 인공 렌즈가 들어 있기 때문이야. 다음부터는 어디가서 건강진단이나 비슷한 점검을 할때에 의례히 있는 설문서에는 꼭 인공렌를 끼고 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돼' 라는 말이 머리속에서 맴돈다. 그렇다 나는 이제부터 의학적으로는 환자인셈이 된것이다. 믿겨지지 않는다. 기분이 이상해진다. 멀쩡한데....